
퇴근길 지하철 창밖으로 반짝이는 아파트 불빛을 바라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저 불빛 아래 사는 사람들은 모두 행복할까?’
화려한 네온사인과 구름을 뚫을 듯 솟아오른 초고층 아파트의 불빛들을 보고 있노라면
문득 가슴 한구석이 헛헛해질 때가 있다.
전 세계가 경탄한다는 경제 성장과 눈부신 디지털 혁명의 한복판에 살고 있지만,
우리는 어째서 이토록 팍팍하고 외로운 것일까.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다시 펼치면 그 질문이 오래 남는다.
이 작품은 1970년대 산업화와 도시 재개발의 그늘에서 밀려난 한 가족의 이야기다.
1976년부터 연작으로 발표되어 1978년 한 권의 책으로 묶인 이 작품에서
‘난장이’는 급격한 성장의 과정에서 삶의 터전과 목소리를 잃어버린 사람들의 얼굴을 상징한다.
그들의 동네 이름은 하필 ‘행복동’이다.
참 묘한 이름이다. 행복동인데 행복하지 않다.
철거 계고장이 날아오고, 집을 잃을 위기에 놓인 사람들은
자신의 삶보다 훨씬 거대한 힘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밀려난다.
한쪽에서는 도시가 눈부시게 성장하고 있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누군가의 삶이 그 성장의 비용으로 사라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 작품의 ‘작은 공’은 현실에서는 너무 작아 보이는 인간의 꿈과 존엄,
그리고 ‘우리도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이다.
그러나 이 소설이 단지 시대의 고발장에 머물지 않고 찬란한 문학적 성취로 남은 이유는,
참혹한 리얼리즘 속에 환상적이고 동화적인 은유를 짜 넣었기 때문이다.
난장이의 큰아들 영수가 그토록 가고 싶어 했던 ‘달나라’는
억압과 착취가 없는 평등한 유토피아의 표상이었다.
비록 현실의 달나라는 철거민들의 절망만이 흩어지는 쓸쓸한 환상에 불과했을지언정,
평화와 사랑을 향한 그들의 목마름만큼은 실재했다.
아픈 곳이 온몸의 중심이 되듯, 이 소설의 중심에는 고통받는 가장 약한 자, 난장이가 있다.
육체적 결핍을 안고도 가족을 위해 성실히 짐을 짊어졌던 난장이 아버지가
마지막에 굴뚝 위에서 종이비행기를 날리며 스러져가는 모습은 깊은 울림을 준다.
그것은 패배자의 허무한 추락이 아니라,
오직 효율과 탐욕만을 좇느라 인간성을 상실해 가는 타락한 세상을 향해 던지는
묵직한 영적 경고이자, 십자가를 짊어진 순교자의 형상과도 같다.
타인의 고통을 짓밟고 일어선 모래성 위에서는
결코 참된 행복과 평화를 누릴 수 없다는 뼈아픈 역설이다.
그런데 이 책을 50년 가까이 지난 지금 다시 읽으면 질문 하나가 더 생긴다.
“그때의 난장이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아마 우리 주변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높아진 집값 앞에서 한숨 쉬는 청년일 수도 있고, 평생 일했지만 노후가 불안한 노동자일 수도 있다.
치솟는 물가를 바라보며 자녀에게 미안해하는 부모일 수도 있다.
화려한 SNS 속 타인의 삶을 바라보다 ‘왜 나만 이렇게 사나’ 싶어지는 평범한 우리 자신일 수도 있다.
모습은 달라졌지만 ‘성장의 바깥에 서 있는 사람’은 여전히 존재한다.
더 무서운 것은 나 역시 어느 순간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난쏘공』은 단순히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오래된 소설로 끝나지 않는다.
이 작품은 우리에게 사람보다 숫자를 먼저 보지 말라고 말한다.
생산성, 집값, 연봉, 자산, 성과가 사람의 가치까지 대신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최근 연구에서도 이 작품을 노동과 계층의 문제뿐 아니라 장애와 취약성, 기억과 망각,
그리고 서로 다른 계층 사이의 연대라는 관점에서 새롭게 읽고 있다.
결국 작은 공이 쏘아 올린 것은 ‘성공’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사람을 사람답게 바라보자는 마음이었다.
우리도 가끔 너무 바쁘게 살아서 옆 사람의 사정을 볼 틈이 없다.
누군가 넘어져도 ‘왜 저렇게 살았을까’부터 생각한다.
하지만 한 발짝만 가까이 가면 보인다.
그 사람에게도 사연이 있고, 견뎌온 시간이 있고, 쉽게 말할 수 없는 눈물이 있다는 것을.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능력보다,
아래를 한 번 바라보는 마음인지도 모른다.
오늘도 누군가는 작은 공 하나를 하늘로 쏘아 올리고 있을 것이다.
‘나도 사람답게 살고 싶다.’
그 작은 소리가 들린다면, 잠시 멈춰 서서 귀를 기울여보자.
세상을 바꾸는 거창한 연대는 아니어도 좋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한 번 더 들어주고, 함부로 판단하지 않고, 따뜻한 온기를 나누는 것.
어쩌면 조세희가 남긴 가장 오래된 질문에 대한 우리의 대답은 거기서부터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당신은 지금, 누구의 아픔을 보며 살아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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