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문장
달이 떴다는 이유로 전화를 거는 사람이 있다는 것 -김용택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가 건네는, 용건 없는 연락의 따뜻함
퇴근길에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오늘 달이 참 예뻐.” 나는 버스 창밖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그래서 무슨 일이야?” 잠깐 조용해졌다. 별일은 없다는 대답을 듣고서야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았다. 아내는 달을 함께 보고 싶었던 것인데, 나는 통화 용건만 확인하려 한 것이다. 회사에서는 퇴근했지만 내 안의 부장은 아직 회의 중이었던 모양이다.…
슬픔에는 마감일이 없다- 박완서 《한 말씀만 하소서》, 다 이해하지 못해도 곁에 머무는 일
장례식장에서 돌아오는 길이면 내가 했던 말을 되짚게 된다. “힘내.” “잘 챙겨 먹고.” “시간이 지나면 조금 괜찮아질 거야.” 마음은 진심이었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 생각하면 어딘가 걸렸다. 말없이 있자니 무심해 보일까 걱정되고, 무슨 말을 하자니 아는 말이 부족했다. 어른이 되면 위로도 능숙해질 줄 알았는데, 나이를 먹을수록 함부로 꺼내기 어려운 말이 늘어난다.…
걷는 사람의 슬픔-파트리크 쥐스킨트 『좀머 씨 이야기』 우리가 알지 못하는 타인의 고통에 대하여
세상에는 참 부지런한 사람들이 많다. 새벽부터 운동하고, 주말에도 산을 오르며, 만 보를 채우지 못하면 잠자리가 불편하다는 사람도 있다. 나는 아직 그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 만 보를 걸으면 건강해졌다는 기쁨보다 다리가 아프다는 현실이 먼저 찾아온다. 그런데 여기, 평생 걷기를 멈추지 못한 사람이 있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 『좀머 씨 이야기』에 등장하는…
내 하늘을 바라보며, 당신의 하늘이 되어-박노해 〈너의 하늘을 보아〉 — 흔들리는 세상에서도 내가 지켜야 할 삶의 방향
퇴근길 지하철에서 내려 집으로 걷다가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루 종일 바쁘게 움직였는데 정작 무엇을 위해 그렇게 서둘렀는지 선뜻 대답하기 어려웠다. 회사에서는 해야 할 일이 많았고, 집에서는 걱정할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정신없이 살다 보니 하루는 금방 지나갔고, 어느새 머리카락에는 흰머리가 제법 늘었다. 세월은 참 성실하다. 내가 무엇을 이루었는지 묻지도 않고 꼬박꼬박…
쉬는 날에도 실적을 찾는 나에게-황보름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가 건네는, 아무것도 해내지 않은 하루의 위로
일요일 아침, 오늘은 푹 쉬겠다고 선언했다. 그러고는 메모장을 열었다. 밀린 글쓰기, 책 읽기, 운동, 집 안 정리. 휴일 계획인데 업무 분장표와 제법 닮아 있었다. 쉬는 날에도 나를 놀리는 법이 없는 것이다. 아내가 커피를 마시며 물었다. “오늘 쉰다면서?” “이것만 하고.” 내가 자주 쓰는 말이다. 문제는 ‘이것’이 끝나면 ‘저것’이 기다린다는 데…
어머니는 정말 배가 부르셨을까-함민복 〈눈물은 왜 짠가〉, 뒤늦게 알아듣는 사랑의 말
식탁에 생선 한 마리가 올라오면 어머니는 늘 비슷한 말씀을 하셨다. “나는 머리 쪽이 맛있더라.” 어릴 때는 그대로 믿었다. 어머니와 나의 취향이 참 잘 맞는다고 생각했다. 나는 살이 많은 몸통이 좋았고, 어머니는 발라 먹기 어려운 머리가 좋다니 얼마나 편리한 일인가. 어린 나는 가족의 평화를 위해 몸통을 성실하게 먹었다. 나이가 들어 아이들…
히가시노 게이고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이 묻는, 어른의 듣는 마음
아들이 진로 이야기를 꺼내면 내 머리와 입술은 분주해지기 시작한다. 취업 전망을 설명하고, 현실적인 선택을 권하고, 내가 젊었을 때 이야기를 보탠다. 아들은 고민 하나를 꺼냈을 뿐인데, 나는 인생 특강을 개설한 셈이다. “아빠, 제 얘기 아직 안 끝났어요.” 그 말에 잠깐 멈춘다. 도와주고 싶었던 것인데 아이의 얼굴은 도움받은 표정이 아니다. 나는 길을…
빨리 보는 세상에서, 오래 바라보는 사람이 된다는 것 -나태주 〈풀꽃〉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사랑의 시선
요즘 나의 시선이 너무 빠르게 이동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아침에는 휴대폰 화면을 서둘러 넘기고, 출근길에는 사람들의 얼굴을 제대로 바라볼 틈도 없다. 누군가 말을 걸어도 다음에 해야 할 일을 생각하고, 가족이 이야기를 시작하면 “그래서 결론이 뭐야?”부터 묻게 된다. 참 바쁘게 산다. 그런데 그렇게 많은 것을 보고 사는데도 정작 가까운 사람은 제대로…
좋은 말은 많이 아는데, 나는 왜 아직도 서툴까-헤르만 헤세 《싯다르타》가 들려주는, 삶으로 배우는 지혜
스마트폰에 저장해 둔 좋은 문장이 꽤 많다. 마음을 비워라, 지금을 살아라. 읽을 때마다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고는 지인의 잘나가는 소식을 듣고 마음이 작아진다. 내 스마트폰은 거의 현자인데, 주인은 아직 수습생이다. 나이가 들면 좀 달라질 줄 알았다. 쉰을 넘기면 마음에도 자동 업데이트가 되는 줄 알았는데, 질투와 서운함은 구형 프로그램 그대로이다. 남에게…
인생이 소풍이라면 우리는 무엇을 남기고 갈까? -천상병의 <귀천>이 건네는, 아름다운 삶의 마지막 인사
요즘 사람들의 삶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자면, 참으로 숨 가쁘고 안쓰럽다는 생각이 든다.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더 크고 화려한 아파트를 갖기 위해, 통장 잔고의 동그라미 숫자를 늘리기 위해, 혹은 누군가에게 과시할 만한 번듯한 명함을 얻기 위해 스스로를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다. 나에게도 그것이 정답인 줄 알고 아등바등 살아온 세월이 있었다. 하지만 쉰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