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소설
『오래된 책 수선소』제9화 — 책이 떠난 자리
지후가 밀어놓은 휴대전화는 해수의 공책 옆에 있었다. 사진 속 토끼는 열린 문을 향해 서 있었다. 해수는 화면을 확대하려다 손을 거두었다. 소년이 자기 전화기에 손을 대는 것을 싫어할 수도 있었다. “좀 크게 봐도 돼?” 지후가 손가락 두 개로 화면을 벌렸다. 집의 창문이 커지면서 토끼의 뒷발이 화면 밖으로 사라졌다. “아니, 아까처럼.” 소년이…
『오래된 책 수선소』제8화 — 돌아오는 시간
가방을 내려놓는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나야. 공책 두고 갔어.” 곽 노인이었다. 가방을 열어보니 공책이 없었다. “내일 가져가겠습니다. 지후는 갔습니까?” “아직 있어.” “아까 찾던 책, 더 찾아봤어요?” “네 전화 없는데 뭘 찾아.” 해수가 말을 잇기 전에 수화기 너머로 소년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진 찍어도 되냐고 묻는다. 네가 찾던 그림.” “찍으면 되죠.”…
『오래된 책 수선소』제7화 — 잠깐만, 이것만 보고
냉장고의 메모를 보고서야 해수는 아내의 부탁을 떠올렸다. 세 시에서 다섯 시 사이. 세면대 수리. 아내는 그 시간에는 집에 있어달라고 했고, 그는 공책을 보며 알겠다고 했다. 오늘은 근무하는 날이 아니었다. 두 시 반 알람을 맞췄다. 수선소에서 집까지 이십 분이면 충분했다. 방에 들어가 세 번째 문장을 읽었다. 이름을 불러주기를 기다린다면 누가 있는지…
『오래된 책 수선소』제6화 — 지우지 않은 문장
수선소의 동화책 옆에 가느다란 종잇조각들이 놓여 있었다. 곽 노인은 찢어진 가장자리를 맞추고 있었다. 일어난 섬유 사이로 토끼 발밑의 그림이 조금 어긋났다. “오늘 붙이십니까?” “이쪽부터.” 노인은 붓의 풀을 덜어내 얇은 종이에 발랐다. 해수는 숨을 줄이고 손끝을 보았다. “바로 책을 덮어도 됩니까?” “안 돼. 이거 한 장 줘.” 해수가 집어 건네자 노인이…
『오래된 책 수선소』제5화 — 다음 날에도 있는 것
곽 노인의 대답에 지후가 안으로 들어왔다. 책에서 두 걸음쯤 떨어져 찢어진 페이지를 보았다. “아직 그대로네요.” “말리는 중이야.” “언제 고쳐요?” “마르면.” 해수는 소년의 운동화를 보았다. 어제보다 말랐고 풀렸던 끈도 묶여 있었다. “아까 책 맡긴 분 다녀갔어.” 지후가 고개를 들었다. “화냈어요?” “속상해하셨지. 목요일까지 고쳐달라고.” 소년이 배낭끈을 고쳐 쥐었다. “내가 잡아당긴 것도 말씀드렸어.”…
『오래된 책 수선소』 제4화 기다리는 사람
해수는 아홉 시가 조금 지나 집을 나섰다. 아내에게는 근무 요일을 정하러 간다고 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신발을 신으며 떠올린 것은 윤지후라는 이름이었다. 수선소는 닫혀 있었다. 유리 너머 작업대에 토끼 그림의 책이 펼쳐져 있었다. 전화를 하려다 곽 노인의 번호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제는 서로 이름만 말했다. 처마 아래에서 기다리는 동안 골목으로…
『오래된 책 수선소』 제3화 불 켜진
곽 노인은 젖은 책장 사이에 얇은 종이를 끼웠다. 해수가 풀 접시를 보자 그가 말했다. “지금 붙이면 안 돼.” 해수는 찬장에서 수건을 꺼내 소년에게 내밀었다. 소년은 그제야 배낭을 벗었다. 윗부분을 누를 때마다 수건에 물기가 배었다. “책은 왜 가져가려고 했어?” “내가 알던 책이라서요.” “읽었던 책?” “비슷한 거. 표지만 봤으니까.” 해수는 낡은 동화책을…
『오래된 책 수선소』 제2화 새로 살 수 없는 책
처음 맡은 일은 선반의 먼지를 닦고 책을 옮기는 것이었다. 해수는 책등의 높이를 맞추고 큰 책을 아래쪽에 모았다. 제법 보기 좋아진 선반 앞에서 곽 노인이 얇은 책 세 권을 꺼냈다. “이건 이쪽.” “크기대로 꽂았는데요.” “이쪽은 맡긴 책. 저쪽은 찾아갈 책.” 해수는 선반 아래의 종이를 그제야 보았다. “말씀을 먼저 해주셨으면…….” 노인은 대답하지…
『오래된 책 수선소』 제1화 이름을 적는 자리
알람은 석 달째 꺼져 있었다. 그런데도 서해수의 눈은 매일 여섯 시 반이면 저절로 떠졌다. 삼십 년 가까이 몸에 새겨진 시계는 사직서를 냈다고 해서 멈춰 주지 않았다. 옆자리에서 아내가 몸을 돌렸다. 해수는 조심스레 거실로 나왔다. 식탁 의자에는 어제 벗어놓은 셔츠가 걸려 있었다. 출근할 곳도 없으면서 다림질까지 한 셔츠였다. 커피를 타다가 싱크대의…
『오래된 책 수선소』프롤로그 — 책을 펼쳐 놓는 일
책장이 저절로 넘어갔다. 곽 노인은 창문을 조금 닫고 작업대 앞으로 돌아왔다. 펼쳐놓은 책은 오래된 요리책이었다. 국과 찌개를 만드는 법이 실린 면마다 손때가 묻어 있었고, 몇 군데에는 갈색 얼룩이 남아 있었다. 책등에서 떨어진 속장은 어제부터 깨끗한 종이 사이에 놓아두었다. 책을 맡긴 여자는 가방에서 그것을 꺼내며 말했다. “엄마가 보던 건데요. 버리기는 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