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드라마
남의 상처 앞에서 나는 너무 똑똑했다-영화 《시민덕희》, 위로보다 판단이 먼저였던 어느 날
지인이 보이스피싱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걸 왜 믿었어? 요즘 그런 전화가 얼마나 많은데.” 내 입에서 걱정보다 잔소리가 먼저 튀어나왔다. 평소에는 눈치가 빠르다고 자부했는데, 정작 눈치가 필요한 순간에는 형편없이 둔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 뭔가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돈을 잃고 얼마나 놀랐을까. 가족에게는 뭐라고 설명했을까. 밤새 잠은 제대로 잤을까. 정작 물어야 할…
우리는 왜 마지막인 줄 알아야 사랑할까 -드라마 《서른, 아홉》이 일깨워준, 내 곁에 있는 사람과 함께할 시간의 소중함
며칠 전 오래된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야, 얼굴 한번 보자. 밥이나 먹게.” “그래, 조만간 보자.” 우리 나이쯤 되면 이 대화는 거의 의례적인 인사이다. ‘조만간’이라는 말은 참 편리하다. 약속을 한 것 같으면서도 날짜를 정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나도 친구도 바쁘다. 회사 일도 있고, 가족 일도 있고, 주말에는 밀린 집안일까지 기다리고…
가족은 잘된 날보다, 무너진 날에 뿌리를 내린다-영화 《미나리》가 보여주는, 다시 살아가는 가족의 힘
새로운 일을 해보겠다고 말하던 저녁이었다. 나는 앞으로의 계획을 열심히 설명했다. 준비만 잘하면 괜찮을 것이라는 말도 여러 번 했다. 아내는 한참 듣다가 물었다. “그동안 생활은 어떻게 할 생각이야?” 순간 조금 서운했다. 꿈을 이야기하는데 왜 현실부터 묻나 싶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꿈은 내가 발표하고, 불안은 가족이 함께 감당하는 구조였다. 내 계획서에는 매출 전망은…
아내의 첫사랑보다 더 몰랐던 것-영화 《인생은 아름다워》가 묻는, 함께 산 사람의 마음
차 안에서 옛 노래가 나오자 아내가 작은 목소리로 따라 불렀다. 나는 별생각 없이 다른 곡으로 넘겼다. “나 그 노래 좋아하는데.” 손이 멈추었다. 함께 산 세월이 얼마인데 그것도 몰랐을까. 아내가 커피를 어떻게 마시는지, 어떤 반찬을 싫어하는지는 안다. 그런데 좋아하는 노래 한 곡은 모르고 있었다.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의 진봉도 아내 세연을…
마음에도 병가가 필요한 날이 있다- 드라마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가 들려주는, 아픈 마음을 대하는 우리의 서툰 태도
어느 날 아침, 출근 준비를 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오늘 하루만 아무도 나를 찾지 않았으면 좋겠다.’ 전화도 오지 않고, 업무 지시도 없고, 가족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연락도 없는 하루. 그냥 이불 속에서 천장만 바라보고 싶은 날이다. 그런데 몸이 아픈 것도 아닌데 쉬겠다고 말하기가 영 어색하다. 허리가 아프면 정형외과에 가고,…
아버지도 한때는 꿈 많은 소년이었다-영화 《국제시장》 가족을 위해 살아온 세월, 그 뒤에 남겨진 한 사람의 인생
영화 《국제시장》을 보고 오래도록 마음에 남은 것은 독일의 탄광도, 총성이 울리던 베트남도 아니었다. 바로 배 한 척이었다. 영화 속 덕수는 어린 시절 선장이 되고 싶었다. 넓은 바다를 누비며 세상을 여행하는 꿈을 품은 소년이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의 혼란 속에서 아버지와 헤어진 뒤, 그의 인생은 전혀 다른 항로로 흘러간다. 선장이 되고 싶었던 소년은…
잘하지 못해도, 좋아했던 마음은 남는다- 드라마 《브람스를 좋아하세요?》가 들려주는, 박수 없는 날의 음악
아들이 베이스를 연습하는 소리가 방 밖으로 새어 나왔다. 같은 부분에서 몇 번이나 멈췄다. 나는 문 앞을 지나며 물었다. “그렇게 해서 어디 무대에 설 수 있겠어?” 아들의 손이 멎었다. 표정을 보며 아차 싶었다. 방을 떠나면서 생각했다. 나는 언제부터 좋아하는 일에도 전망을 요구했을까. 재미있어서 한다는 말만으로는 부족하고, 잘할 가능성이나 쓸모를 보여줘야 안심하는…
핸들을 돌리기까지, 아버지는 얼마나 두려웠을까 -영화 《택시운전사》가 묻는 먹고사는 일과 사람답게 사는 일
회의에서 후배가 억울한 지적을 받았다. 함께 맡은 일이었는데 책임은 후배에게 쏠렸다. 내가 설명하면 풀릴 일이었다. 그런데 입이 쉽게 열리지 않았다. 괜히 나까지 불편해지는 것은 아닐까. 회의가 끝난 뒤 후배에게 말했다.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 위로는 제때 했는데, 필요한 말은 제때 하지 못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 차이가 자꾸 마음에…
가족은 피보다 밥으로 만들어지는지도 모른다-《조립식 가족》이 보여준, 함께 밥 먹는 사람의 힘
‘가족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같은 성을 쓰는 사람일까. 같은 피를 나눈 사람일까. 아니면 법적으로 가족관계증명서에 이름이 올라 있는 사람일까. 그런데 우리는 일상에서 가족보다 더 가까운 사람을 만날 때가 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는데도 내 안부를 묻고, 내가 아프면 걱정하고, 밥을 먹었는지 먼저 물어보는 사람이다. 어쩌면 가족은 피보다 밥으로 만들어지는 것인지도…
내 인생의 잡음도 음악이 될 수 있을까 -영화 《비긴 어게인》이 들려주는, 서로의 재출발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회사를 그만두었다고 했다. 정확히는 그만두게 되었다는 쪽에 가까웠다. 나는 커피잔을 내려놓고 곧바로 대책을 꺼냈다. 자격증은 있는지, 아는 사람에게 연락해봤는지, 요즘 어떤 일이 유망한지 떠들었다. 친구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조용히 말했다. “오늘은 그냥 얼굴 보려고 나온 거야.”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영화 《비긴 어게인》의 두 사람도 삶이 뜻대로 풀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