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 전 길을 걷다가 나도 모르게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무슨 노래였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누가 듣는 것도 아니고, 잘 부를 필요도 없었다.
그냥 내가 좋아서 흥얼거리는 노래였다.
생각해보니 요즘 우리는 이렇게 사는 일이 별로 없다.
무언가를 해도 남들이 어떻게 볼지 먼저 생각한다.
자식이 잘되면 내가 잘 산 것 같고,
친구가 좋은 아파트로 이사하면 괜히 내 집이 초라해진다.
누군가의 자녀가 의사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 집 자식의 직업을 슬쩍 비교한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나는 도대체 언제부터 내 인생을 남의 성적표로 살고 있었을까.’
김광석의 〈나의 노래〉를 다시 들으면 바로 그 지점에서 마음이 멈춘다.
이 노래는 대단한 성공을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가진 것이 많지 않은 사람에게도 노래가 힘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흔들리고 넘어지는 삶 속에서도 자기 목소리를 놓지 않는 사람의 이야기이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나는 종종 이 노래를 흥얼거리게 된다.
젊을 때는 ‘남들보다 잘되는 것’이 중요한 줄 알았다.
좋은 직장과 넓은 집, 풍요로운 삶….
열심히 달리다 보면 언젠가는 마음도 편안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십쯤 되고 보니 조금 알겠다.
인생은 남보다 앞서가는 경주가 아니라,
결국 자기 목소리를 잃지 않고 살아가는 일인지도 모른다는 것을 말이다.
철학자 에리히 프롬은 인간이 타인의 기대에 맞춰 살아갈수록 자신의 진짜 모습을 잃을 수 있다고 보았다.
현대인은 자유를 얻었지만 동시에 ‘남들이 원하는 나’가 되어야 한다는 압박도 함께 짊어졌다는 것이다.
젊을 때는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이 서럽더니,
나이가 들면 내가 세상을 너무 의식하며 살았다는 사실이 조금 서럽다.
이제는 조금 다르게 살아도 괜찮지 않을까.
친구가 주식으로 돈을 벌었다고 해서 나도 따라갈 필요는 없다.
옆집 아들이 성공했다고 해서 내 자식이 부족한 것도 아니다.
누군가 해외여행을 다닌다고 해서 나는 집 앞 공원을 걷는 삶을 부끄러워할 이유도 없다.
내 형편에 맞는 밥을 먹고, 내가 좋아하는 책을 읽고,
가끔은 이유 없이 음악을 틀어놓고 콧노래를 부르는 것.
어쩌면 그것이 ‘내 인생’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가장 소박한 방법인지도 모른다.
김광석의 노래가 특별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의 음악은 영웅의 이야기가 아니라 흔들리는 보통 사람의 마음을 노래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은 그의 노래에서 자신의 삶을 발견한다.
나이가 들수록 필요한 것은 더 큰 목소리가 아니다.
오히려 작은 목소리라도 좋으니 내 목소리를 잃지 않는 일이다.
오늘 하루가 마음대로 풀리지 않았더라도 괜찮다.
통장 잔고가 생각보다 적고, 자식 걱정에 마음이 무겁고,
몸 여기저기가 예전 같지 않아도 괜찮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좋아하는 노래 한 곡을 틀어놓고 조용히 따라 불러보자.
누가 듣든 말든 상관없다.
박수 받을 필요도 없다.
그저 내가 나에게 들려주는 노래이면 된다.
중년의 삶에서 가장 늦게 찾아오는 자유는 어쩌면 이것인지도 모른다.
‘남들이 뭐라 하든, 나는 내 노래를 부르며 살겠다.’
대단한 결심은 아니어도 좋다.
오늘부터라도 내 인생의 배경음악만큼은 남에게 맡기지 않는 것.
그것이 팍팍한 세월을 건너온 우리에게 남은, 아주 작지만 꽤 근사한 용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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