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휴대전화 알람을 세 번이나 끄고도 이불 속에 누워 있었다.
눈은 떴는데 몸을 일으킬 이유가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회사에서 내 자리가 흔들린다는 말을 들은 뒤로 아침이 길어졌다.
예전에는 출근하기 싫어도 갈 곳이 있었다.
이제는 갈 곳이 없어질까 봐 일어나기가 싫었다.
사람 마음이 참 복잡하다.
월요일을 그렇게 미워했는데,
막상 월요일이 나를 떠날 것 같으니 붙잡고 싶어진 것이다.
아내가 방문을 열었다.
“밥 먹어.”
나는 대답 대신 이불을 조금 더 끌어올렸다.
배가 고픈 것과 세상에 나갈 기운이 있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실패가 무서운 까닭은 돈이나 자리를 잃기 때문만은 아니다.
어느 순간부터 사건이 내 이름을 대신하기 때문이다.
사업이 어려워진 사람이 ‘실패한 사람’이 되고,
회사에서 밀려난 사람이 ‘쓸모없는 사람’이 된다.
상황을 설명하던 말이 사람 전체를 판결하는 말로 바뀌는 것이다.
나 역시 그랬다.
수십 년 동안 버텨온 날들은 잊고,
좋지 않은 소식 하나로 내 인생의 성적표를 마감하고 있었다.
그날 오후, 오래된 노래 목록에서 김광석의 〈일어나〉를 틀었다.
1994년에 발표된 노래였다.
젊었을 때는 기타 소리에 맞춰 씩씩하게 따라 불렀는데,
나이가 들어 다시 들으니 목소리가 다른 곳에 닿았다.
이 노래에는 고단함을 모르는 사람의 자신만만함이 없었다.
어둡고 지친 마음을 지나온 목소리가 다시 한번 몸을 일으켜보자고 말을 거는 듯했다.
그러다 “봄의 새싹들처럼”이라는 대목에서 잠시 멈췄다.
새싹은 참 작다.
겨우 흙 밖으로 고개를 내민 것을 두고
우리는 왜 그것밖에 못 자랐느냐고 따지지 않는다.
그런데 나에게는 유난히 엄격했다.
다시 시작하려면 예전만큼 벌어야 하고,
남들이 인정할 만한 일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첫걸음부터 재기 성공 인터뷰를 준비하고 있었던 셈이다.
철학자 알베르 카뮈의 《시지프 신화》가 떠올랐다.
시지프는 산 위로 바위를 밀어 올리지만 바위는 다시 굴러떨어진다.
카뮈는 그 끝없는 반복 속에서도
자신의 처지를 똑바로 바라보고 살아가는 인간을 생각했다.
그 이야기를 내 하루에 가져오면 이런 물음이 남는다.
결과가 뜻대로 되지 않았다고,
그동안 살아낸 시간까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까.
실패를 알고도 오늘 할 일을 고르는 내 손에는 아직 힘이 남아 있지 않을까.
물론 노래 한 곡으로 현실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통장 잔고도 그대로였고 회사의 사정도 나아지지 않았다.
다만 나는 소파에서 일어나 세수했다.
밀린 그릇을 씻고, 오랫동안 미뤄둔 이력서 파일을 열었다.
경력란을 읽다가 조금 놀랐다.
나는 생각보다 많은 일을 해온 사람이었다.
위기라는 말에 가려 그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다.
저녁에 아내가 물었다.
“오늘은 좀 어때?”
“아직 모르겠어. 그래도 이력서는 열어봤어.”
아내는 고개를 끄덕이며 밥그릇을 내 쪽으로 밀어주었다.
그날의 응원은 따뜻한 밥이었다.
〈일어나〉를 들으며 생각한다.
다시 일어서는 데는 내 결심도 필요하지만,
일어난 뒤 잠시 기대어 숨을 고를 사람도 필요하다고.
그러니 누군가 주저앉아 있다면 먼저 곁에 앉아 있어도 좋을 것이다.
나도 그런 시간이 필요했던 사람이다.
내일 아침에도 알람을 한 번쯤 끌지 모른다.
그래도 커튼은 열어볼 생각이다.
봄의 새싹도 첫날부터 숲이 되지는 않는다.
오늘은 이불 밖으로 나온 만큼, 그만큼의 하루를 살아볼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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