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끔 거울을 보다가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나는 지금 제대로 살고 있는 걸까.”
나이가 들수록 이런 질문은 더 어려워진다.
젊을 때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제법 자신 있게 말했는데,
막상 세상을 살아보니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먹고사는 일도 만만치 않고, 직장에서는 눈치를 봐야 하고, 가족을 책임지다 보면
‘옳은 것’보다 ‘당장 필요한 것’을 선택하게 되는 날도 많다.
그런 ‘현재의 나’에 대한 상념에 젖어 있다가 문득 떠오른 영화《동주》…
일제강점기라는 칠흑같이 암울한 시대 속에서,
총 대신 펜을 든 윤동주와 온몸을 던져 독립운동에 뛰어든 송몽규
영화《동주》는 두 인물의 엇갈린 삶을 담담하게 비춘다.
동주는 먼저 행동하고 피 흘리는 몽규의 등 뒤에서 끝없이 번민한다.
시대의 거대한 비극 앞에서 고작 시(詩) 따위나 끄적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한없이 작고 초라해 보였으리라.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감옥의 차가운 바닥에서 스러져가면서도 그는 끊임없이 자신을 부끄러워했다.
하지만 이 뼈아픈 고백 속에는 양심과 도덕을 지키며 살고자 했던
한 순결한 영혼의 삶의 방향성이 오롯이 담겨 있다.
동주의 ‘부끄러움’을 보며 문득 부끄러움을 잃어버린 우리네 자화상을 돌아보게 된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남을 짓밟고 올라서는 것을 ‘능력’이라 부르고,
양심의 가책쯤은 ‘세상 물정 모르는 소리’라며 비웃는 팍팍한 세상에 살고 있다.
나 하나, 내 가족만 잘 살면 그만이라는 이기심으로
상처 입은 타인의 아픔에는 애써 눈을 감아버린다.
그러나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고 나 홀로 누리는 평안이 과연 진짜 행복일까.
동주가 밤하늘의 별을 우러러보며 느꼈던 그 지독한 부끄러움은,
실상 타인의 고통을 깊이 공명할 줄 아는 ‘심정(心情)’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할 줄 아는,
그 연약하지만 따뜻한 마음이야 말로,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도덕의 근원이라 생각한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삶의 방향성은 거창한 이념이나 승리에 있는 것이 아니다.
동주처럼 나의 결핍과 나약함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타인의 아픔에 함께 눈물 흘려주는 따뜻한 연대감에 있다.
부끄러움을 안다는 것은 결코 나약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내 영혼이 아직 숨을 쉬고 있다는 증거이며,
내 곁에 있는 상처받은 누군가를 향해 손을 내밀고
기꺼이 비를 함께 맞아줄 준비가 되어 있다는 살아있는 양심의 선언이다.
“나는 잘 살고 있는가”
그 질문 하나를 품고 잠드는 것만으로도 삶의 방향은 조금 달라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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