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족 단톡방에 사진 한 장을 올렸다. 출근길에 본 하늘이었다.
“오늘 날씨 좋다. 다들 좋은 하루!”
한참 뒤 확인하니 숫자가 사라져 있었다.
모두 읽었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답장은 없었다.
하트 하나, 웃는 얼굴 하나 없었다.
하늘은 맑았는데 내 마음에는 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조금 뒤 아들이 물었다.
“오늘 저녁 뭐야?”
내 하늘 사진은 묵묵히 지나치더니 메뉴에는 관심이 있었다.
이 집에서 아버지의 감성보다 냉장고의 재고가 더 중요한 모양이었다.
괜히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별일 아니라면서도 다시 들여다봤다.
누군가 뒤늦게라도 반응해주기를 기다리는 내가 조금 우스웠다.
그러다 깨달았다.
내가 기다린 것은 사진에 대한 감상평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여기 있다는 것을 알아주는 작은 신호였다.
좋은 하루를 보내라는 말 속에
나도 당신들 하루에 끼워달라는 마음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가족 단톡방은 이상한 공간이다.
누구보다 가까운 사람들이 모여 있는데 때로는 가장 멀게 느껴진다.
말은 금방 도착하지만 마음까지 도착했는지는 알 수 없다.
짧은 답장에는 표정이 없고, 침묵에는 설명이 없다.
그 빈자리를 내 서운함이 성실하게 채운다.
‘귀찮은가.’
‘내 말은 중요하지 않은가.’
그런데 내 휴대전화에도 답하지 않은 메시지가 있었다.
아내가 보낸 장보기 부탁이었다.
읽고 기억해두었다고 생각했지만
아내에게는 아무 신호도 보내지 않았다.
남의 침묵에는 무관심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내 침묵에는 사정이 있었다.
기술과 인간관계를 연구해온 셰리 터클은 《Reclaiming Conversation》에서
얼굴을 마주하는 대화가 공감과 관계를 기르는 데 중요하다고 이야기한다.
화면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만으로
서로를 충분히 이해하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그 말을 가족의 식탁에 가져오니 내가 놓친 것이 보였다.
답장의 길이는 세고 있었지만 아들의 얼굴은 제대로 보지 않았다.
아이가 어떤 하루를 보내는지 묻기 전에
내 메시지를 얼마나 성의 있게 읽었는지부터 평가하고 있었다.
저녁에 아들과 마주 앉았다.
“아빠 사진에는 아무도 대답이 없더라. 조금 서운했어.”
평소 같으면 가족끼리 관심 좀 가지라는 훈계가 뒤따랐을 것이다.
이번에는 거기서 멈췄다.
아들이 잠깐 생각하더니 말했다.
“봤어. 예쁘더라. 근데 수업 들어가다가 봐서.”
그 설명 하나로 내 머릿속에서 혼자 작성하던 가족관계 보고서가 수정되었다.
아내는 옆에서 웃었다.
“나는 당신 장보기 답장 기다렸는데.”
순간 내가 감사 대상이 되었다.
나는 잘못을 인정하고 내일은 우유를 사오겠다고 했다.
우리의 마음이 서로에게 자동으로 전달되는 것은 아니었다.
가까운 사이라 생략한 말이 많았고,
익숙한 사이라 굳이 묻지 않은 사정도 많았다.
내가 원하는 관심의 방식과 아이가 표현하는 방식도 조금 달랐다.
그날 이후 단톡방이 갑자기 활발해지지는 않았다.
여전히 내가 가장 길게 쓰고 아이들은 짧게 답한다.
다만 가끔은 화면을 닫고 직접 묻는다.
오늘은 어땠는지, 아까 보낸 말은 무슨 뜻이었는지.
이모티콘 하나에도 마음이 담길 수 있다.
그래도 오해가 생긴 날에는 얼굴을 볼 용기를 내고 싶다.
표정을 보며 묻고, 예상과 다른 대답도 들어보고 싶은 것이다.
오늘도 가족 단톡방에 사진을 올렸다. 답장은 아직 없다.
저녁에 만나면 보여줄 생각이다.
휴대전화를 얼굴 앞에 들이밀기 전에, 먼저 아이의 하루부터 물어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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