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끔 뉴스를 보다가 화면을 얼른 넘겨버릴 때가 있다.
너무 참혹해서 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든다.
‘나는 지금 무엇을 외면하고 있는 걸까’
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읽고 나면 이 질문이 오래 남는다.
이 소설은 1980년 5월 광주에서 시작된다.
중학생 동호는 친구 정대와 함께 시신들이 놓인 상무관에서 일을 돕는다.
죽은 사람들의 얼굴에 흰 천을 덮어주고, 그 곁에 촛불을 밝힌다.
그러다 동호 역시 죽음의 한가운데로 들어간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 정말 아픈 것은 죽음 그 자체만이 아니다.
죽은 사람은 떠났지만, 남은 사람은 그날 이후에도 계속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소설은 한 사람의 죽음에서 끝나지 않는다.
몇 년 뒤, 또 몇 년 뒤로 시간이 흘러간다.
살아남은 사람들의 몸에는 고문의 흔적이 남고, 마음에는 지워지지 않는 기억이 남는다.
『소년이 온다』는 5·18을 과거의 한 사건으로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이후 수십 년 동안 이어진 사람들의 고통을 여러 인물의 이야기로 펼쳐 보인다.
그래서 책을 읽는 동안 자꾸 마음이 무거워진다.
‘그때 내가 그곳에 있었다면 나는 무엇을 했을까.’
우리는 평소에도 타인의 고통을 쉽게 지나친다.
지하철에서 누군가 힘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어도 모른 척하고,
옆자리 사람이 힘들다는 말을 해도 ‘나도 힘들어’ 하며 마음의 문을 닫는다.
하물며 폭력과 공포가 지배하는 시대라면 더 그럴 것이다.
그런데 『소년이 온다』에는 가슴을 장면들이 있다.
죽은 사람에게 흰 천을 덮어주고, 피를 흘리는 사람을 위해 헌혈을 하고,
위험한 상황에서도 누군가의 곁에 남는 사람들이 있다.
한강 작가가 어린 시절 보았던 광주의 사진에서 오랫동안 풀리지 않았던 것도 바로 이 모순이었다고 한다.
인간은 어떻게 그렇게 잔인해질 수 있는가.
그런데 동시에 인간은 어떻게 그렇게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내어줄 수도 있는가.
작가에게 이 두 모습은 오랫동안 풀리지 않는 질문이었다.
나는 그 질문이 이 소설의 가장 깊은 곳에 있다고 생각한다.
폭력은 사람을 침묵하게 만든다.
두려움은 사람을 자기 안으로 숨게 만든다.
하지만 누군가의 고통 앞에 멈춰 서는 마음은 그 폭력에 완전히 굴복하지 않는다.
동호가 죽은 사람에게 흰 천을 덮어주는 장면이 그래서 오래 남는다.
거창한 영웅적 행동이 아니다.
그저 한 사람의 얼굴을 마지막까지 사람답게 대해주는 일이다.
어쩌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이런 작은 행동인지도 모른다.
‘당신의 고통을 못 본 척하지 않겠습니다.’
그 마음 하나가 기억이 되고, 증언이 되고, 결국 다음 사람에게 건너가는 힘이 된다.
그래서 제목이 ‘소년이 온다’인지도 모르겠다.
소년은 이미 죽었다.
그런데 소설 속에서는 계속 우리에게 다가온다.
5년 뒤에도, 10년 뒤에도, 30년 뒤에도 그의 기억은 사라지지 않고 현재의 우리 앞에 선다.
한강 작가 역시 동호가 흰 천을 덮고 촛불을 밝히는 이미지에서 시작해,
그 소년이 긴 시간을 건너 우리에게 오는 모습을 제목으로 삼았다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모든 상처를 해결할 수는 없다. 지나간 시간을 되돌릴 수도 없다.
다만 한 사람의 아픔을 너무 빨리 판단하지 않는 것,
누군가의 슬픔을 ‘그 사람의 문제’라고 밀어내지 않는 것,
그리고 오래된 고통이라도 기억할 가치가 있다고 말해주는 것은 가능하다.
사랑이라는 말이 너무 크고 멀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럴 때 나는 조금 작게 생각해보고 싶다.
아픈 사람 곁에서 자리를 뜨지 않는 것.
말할 수 없는 사람을 대신해 기억해주는 것.
그리고 타인의 고통 앞에서 내 마음의 문을 닫지 않는 것.
어쩌면 그것이 사랑의 가장 오래된 모습일 것이다.
『소년이 온다』는 우리에게 역사를 외우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묻는다.
“당신은 다른 사람의 고통을 어디까지 외면하지 않을 수 있는가.”
그 질문 앞에서는 누구도 쉽게 대답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덮고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다만 내면 깊은 곳에서 조용히 한마디를 건넸다.
“잊지 않을게. 당신이 겪은 아픔이 없었던 일이 되지 않도록.”
그 정도의 마음이라도 우리가 서로에게 남겨줄 수 있다면,
폭력의 시대를 견디고 살아남은 인간의 마음은 아직 완전히 무너지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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