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살다 보면 정말 넘을 수 없을 것 같은 벽을 만날 때가 있다.
사업이 잘되지 않아 통장 잔고가 바닥을 보일 때도 그렇고,
오랫동안 준비한 일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었을 때도 그렇다.
가족과의 관계가 꼬여 아무리 말해도 마음이 닿지 않을 때도 있다.
나이가 들수록 몸은 예전 같지 않고, 세상은 나만 빼놓고 빠르게 달려가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그럴 때 우리는 흔히 이렇게 생각한다.
‘이건 내가 혼자 해결해야 할 문제야.’
그런데 도종환의 시 《담쟁이》를 읽으면 조금 다른 생각이 든다.
담쟁이는 벽을 단숨에 뛰어넘지 않는다. 한 번에 몇 미터씩 오르는 것도 아니다.
그저 아주 조금씩, 자기 몸을 벽에 붙이며 올라간다.
시인은 그 모습을 두고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고 노래한다.
이 대목에서 나의 마음이 오래 머문다.
담쟁이 한 잎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인다.
손바닥보다 작은 잎 하나가 거대한 벽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있겠는가.
그런데 그 작은 잎들이 모이고 또 모인다.
먼저 올라간 잎이 자리를 만들고, 뒤따르는 잎들이 그 자리를 이어받는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 어느 순간 회색 벽이 초록빛으로 덮이기 시작한다.
벽을 이겨낸 것은 작은 존재들이 서로 연결된 힘이다.
우리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힘든 시기를 지나온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결정적인 순간에 나를 일으켜 세운 것은 대단한 성공 공식이 아니었다는 것을.
“괜찮아?” 하고 물어봐 준 친구의 한마디였고, 말없이 따뜻한 밥 한 끼를 차려준 가족의 손길이었으며,
힘든 일을 알아주는 동료의 짧은 격려였을 때가 많다.
때로는 내가 누군가의 담쟁이가 되기도 한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내가 건넨 전화 한 통이 누군가에게는 하루를 버티게 하는 힘이 될 수도 있다.
퇴근길에 건넨 “오늘 고생 많았어요”라는 말 한마디가 어떤 사람에게는 다시 내일을 살아갈 이유가 될 수도 있다.
그러니 세상을 바꾸는 일은 꼭 거창할 필요가 없다.
혼자서 세상을 바꾸겠다고 하면 금방 지친다.
하지만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조금씩 받쳐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한 사람이 넘어질 때 다른 사람이 잠깐 손을 내밀고,
내가 힘이 있을 때 누군가의 짐을 조금 들어주면 된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벽에 붙어 살아가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철학자 마르틴 부버가 인간을 ‘나와 너’의 관계 속에서 이해했던 것도 결국 비슷한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인간은 혼자 완성되는 존재가 아니라 누군가와 관계를 맺으며 비로소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존재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다리가 놓일 때 삶은 조금 덜 외롭고, 조금 더 견딜 만해진다.
어쩌면 우리가 꿈꾸는 ‘이상향’도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인지 모른다.
하늘에서 갑자기 내려오는 거대한 선물이 아니라, 오늘 내가 누군가의 손을 한 번 잡아주는 것에서 시작되는 세상이다.
나 하나의 힘은 작지만, 작은 손길이 이어지면 삶의 벽을 조금씩 덮어갈 수 있다.
도종환의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는다. 그저 한 뼘씩 올라간다.
그리고 혼자가 아니라 함께 올라간다. 결국 그 작은 잎들이 거대한 벽을 넘어선다.
그러니 오늘 벽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괜찮아요. 혼자 올라가지 않아도 됩니다.”
나도 옆에서 한 뼘쯤 같이 올라가겠다고.
어쩌면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평범하면서도 가장 위대한 일인지 모른다.
혼자서는 세상을 바꾸기 어렵다.
하지만 손을 맞잡은 평범한 사람들은 세상의 벽 하나쯤은 넘어설 수 있다.
담쟁이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결국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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