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국제시장》을 보고 오래도록 마음에 남은 것은
독일의 탄광도, 총성이 울리던 베트남도 아니었다.
바로 배 한 척이었다.
영화 속 덕수는 어린 시절 선장이 되고 싶었다.
넓은 바다를 누비며 세상을 여행하는 꿈을 품은 소년이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의 혼란 속에서 아버지와 헤어진 뒤,
그의 인생은 전혀 다른 항로로 흘러간다.
선장이 되고 싶었던 소년은
정작 자신의 인생이라는 배에서는 마음대로 방향을 정할 수 없었다.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독일의 깊은 탄광으로 내려갔고,
전쟁 중인 베트남으로 떠났다.
자신이 가고 싶은 곳보다 가족을 위해 가야 하는 곳이 먼저였다.
우리는 아버지라는 사람에게 꿈이 있었다는 사실을 자주 잊는다.
내 기억 속 아버지는 언제나 아버지였다.
돈을 벌고, 가족을 책임지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해결책을 찾아야 하는 사람이었다.
마치 태어날 때부터 아버지라는 직업을 부여받은 사람처럼 여겼다.
세상에서 가장 오래 일하면서도 퇴직금 한 푼 없는 직업이 아버지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아버지도 한때는 누군가의 귀한 아들이었고,
하고 싶은 일이 많았던 청년이었다.
좋아하는 노래가 있었을 것이고, 가슴 뛰는 꿈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아버지가 무엇을 포기했는지 잘 모른다.
묻지 않았기 때문이다.
《국제시장》에서 덕수가 끝내 놓지 못하는 것은
국제시장의 작은 가게 ‘꽃분이네’이다.
가족들에게는 낡고 오래된 가게이지만,
덕수에게는 헤어진 아버지가 언젠가 찾아올지도 모르는 약속의 장소이다.
가게를 지키는 일이 곧 아버지를 기다리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 장면이 유난히 아팠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속에 자신만의 ‘꽃분이네’ 하나쯤 품고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남들에게는 별것 아닌 물건이나 장소가 누군가에게는 평생 놓지 못할 기억일 수 있다.
그런 사정을 모르면 우리는 쉽게 말한다.
이제 그만 잊으라고. 낡은 것은 버리라고. 지난 일에 매달리지 말라고.
하지만 그 사람에게는 버리는 순간 함께 사라질 것 같은 소중한 시간이 있는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늙은 덕수가 아버지 앞에서 평생의 고단함을 털어놓는 장면은
그래서 더욱 먹먹하다.
가족 앞에서는 평생 든든한 가장이었던 사람이
그 순간만큼은 아버지에게 위로받고 싶은 어린아들로 돌아간다.
그 모습을 보며 깨달았다.
아버지도 누군가에게는 기대고 싶은 사람이었고,
괜찮지 않다고 말하고 싶은 날이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부모의 희생을 흔히 위대한 사랑이라고 부른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 희생을 아름다운 이야기로만 기억하면 자칫 중요한 것을 놓칠 수 있다.
그들이 얼마나 많은 것을 참고 견뎌야 했는지,
그 과정에서 얼마나 자주 자신의 마음을 뒤로 미뤘는지 말이다.
가족을 위해 살아온 세월은 존중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다음 세대까지 똑같은 희생을 반복해야 한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이제는 조금 다르게 살아도 좋겠다.
아버지가 가족을 위해 자신의 꿈을 접었다면,
우리는 가족이라는 이유로 누군가의 꿈이 접히지 않도록 서로 살펴주는 것이다.
아내에게도 아내만의 인생이 있고,
자녀에게도 부모가 대신 살아줄 수 없는 삶이 있다.
나 역시 가장이라는 이름 말고도 좋아하는 글을 쓰며 살아가고 싶은 한 사람이다.
가족은 누군가 한 사람의 희생 위에 세워지는 집이 아니라,
서로의 삶을 지켜주는 울타리였으면 좋겠다.
영화를 떠올리며 다시 덕수의 어린 시절을 생각한다.
만약 그 소년이 전쟁을 겪지 않았다면 정말 선장이 되었을까.
어쩌면 다른 일을 하며 살았을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선장이 되었느냐가 아니다.
자신이 원하는 삶을 선택할 기회가 있었느냐는 것이다.
아버지에게는 이제 그 질문을 드릴 수 없다.
그 사실이 가끔 마음에 남는다.
그러나 지나간 세월을 돌이킬 수 없다고 해서 오늘까지 늦은 것은 아닐 것이다.
아직 내 곁에는 자신의 꿈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가족을 위해 애쓴다는 이유로 정작 자신의 행복을 미안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도 가끔 물어보려 한다.
가족을 책임지는 일에만 몰두하다가 내가 사랑했던 것들을 잊고 살지는 않았는지.
아버지가 내게 남긴 가장 큰 유산은 당신처럼 희생하며 살라는 가르침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게 해준 그 세월인지도 모른다.
영화 속 덕수는 끝내 선장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이제 그가 이루지 못한 꿈까지 기억하고 싶다.
가족을 위해 평생을 살아낸 훌륭한 아버지로만이 아니라,
한때 넓은 바다를 꿈꾸었던 소년 덕수로.
우리 아버지도 그랬을 것이다.
아버지가 되기 전에, 먼저 자신의 인생을 꿈꾸던 한 사람이었다.
답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