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 사람의 슬픔-파트리크 쥐스킨트 『좀머 씨 이야기』 우리가 알지 못하는 타인의 고통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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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참 부지런한 사람들이 많다.

새벽부터 운동하고, 주말에도 산을 오르며,

만 보를 채우지 못하면 잠자리가 불편하다는 사람도 있다.

나는 아직 그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

만 보를 걸으면 건강해졌다는 기쁨보다 다리가 아프다는 현실이 먼저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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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여기, 평생 걷기를 멈추지 못한 사람이 있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 『좀머 씨 이야기』에 등장하는 좀머 씨이다.

그는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걷는다.

배낭을 메고 긴 지팡이를 짚은 채 마을과 숲길, 호숫가를 끊임없이 돌아다닌다.

비가 와도, 바람이 불어도 멈추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를 이상하게 여긴다.

도대체 어디를 가는 것인지, 무엇 때문에 저렇게 걷는 것인지 궁금해한다.

하지만 아무도 그의 마음속에 무엇이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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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거센 비바람 속에서 소년의 아버지가

좀머 씨에게 차를 태워주겠다고 권한다.

그러나 그는 도움을 거절하며 자신을 제발 가만히 내버려 두라고 외친다.

처음에는 참 고약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호의를 베풀겠다는데 저렇게까지 거절할 필요가 있을까.

그런데 책을 읽어갈수록 그 말이 다르게 들린다.

어쩌면 그는 사람을 싫어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자신의 고통을 설명해야 하는 일이 너무 버거웠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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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에서 유난히 오래 남는 장면이 있다.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은 소년이 나무 위에 올라 삶을 끝내려던 순간이다.

그때 우연히 좀머 씨가 나무 아래에 나타난다.

잠시 걸음을 멈춘 좀머 씨는 땅에 누워 고통스러운 신음을 토해낸다.

소년은 그 모습을 지켜본다.

그리고 어느새 자신이 왜 나무에 올라왔는지조차 잊어버린다.

참 기묘한 장면이다.

죽고 싶을 만큼 괴로웠던 소년이 자신보다 더 깊은 고통을 품은 듯한 어른을 만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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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머 씨는 소년을 위로하지 않았다.

인생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설교하지도 않았다.

그저 자신의 고통을 견디고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그 만남이 소년의 발걸음을 돌려놓는다.

사람의 마음이란 이토록 알 수 없는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아무 의미 없었던 행동이

다른 사람의 인생에는 오래 남는 사건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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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좀머 씨의 고통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그는 호수 안으로 걸어 들어가 돌아오지 않는다.

소년은 그 장면을 목격하지만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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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덮고 나서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소년은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까.

좀머 씨가 남긴 간절한 부탁을 지켜주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아직 어린 소년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사건이었던 것일까.

어느 쪽이든 그 침묵을 아름다운 배려라고만 말하기는 어렵다.

누군가의 고통을 존중하는 일과 위험에 처한 사람을 외면하지 않는 일은

함께 고민해야 할 문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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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나는 그 장면에서

우리가 얼마나 쉽게 다른 사람의 절망을 알아차리지 못하는지 생각하게 되었다.

좀머 씨는 늘 사람들 눈앞을 걸어 다녔다.

모두가 그를 보았지만, 정작 그가 어떤 아픔을 견디며 살아가는지는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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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우리 주변에도 그런 사람이 있을 것이다.

아무렇지 않게 출근하는 동료, 늘 웃으며 인사하는 이웃,

가족을 위해 묵묵히 일하는 누군가.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으로는 그 사람이 밤마다 어떤 걱정을 하는지,

무엇을 견디며 하루를 보내는지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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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역시 다르지 않다.

사람의 속마음은 모르면서 행동의 이유부터 설명하려 든다.

이 나이쯤 되면 사람 보는 눈이 생겼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늘어난 것은 판단의 속도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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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머 씨 이야기』는 끝내 좀머 씨의 고통에 명확한 이름을 붙여주지 않는다.

그 점이 오히려 이 소설의 깊이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의 모든 사정을 알아내는 일이 아니라,

내가 모르는 아픔이 그 사람 안에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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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해하려는 마음만으로 모든 고통을 해결할 수는 없다.

어떤 사람에게는 따뜻한 관심이 필요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하다.

때로는 조심스러운 질문과 실질적인 도움이 절실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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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것은 내 방식의 친절을 상대에게 강요하지 않는 일일 것이다.

책을 읽고 나니 좀머 씨가 걸었던 길이 자꾸 생각난다.

그는 무엇으로부터 달아나고 있었을까.

아니면 걸음을 멈추는 순간 밀려올 고통이 두려웠던 것일까.

끝내 알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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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한 가지 바람이 남는다.

그가 그렇게 오래 걸어야만 했던 세상 어딘가에,

잠시 멈춰 쉬어도 괜찮은 자리가 하나쯤 있었더라면.

그리고 우리 곁에서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자리를 조금이나마 내어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자리.

그러나 정말 힘들 때에는 기꺼이 손을 내밀 수 있는 자리.

누군가의 인생을 다 알 수는 없지만,

그 길이 너무 외롭지 않게 곁을 지켜주는 일은 가능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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