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내의 생일을 사흘 앞두고 휴대전화에 알림이 떴다.
‘소중한 사람의 생일을 잊지 마세요.’
참 친절한 세상이다. 이제는 가족의 생일까지 기계가 챙겨준다.
문제는 휴대전화가 기억해 주는 만큼 내 마음도 기억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급하게 선물을 검색했다.
인기 상품, 추천 선물, 연령별 베스트까지 친절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몇 번의 클릭 끝에 결제를 마쳤다. 배송 날짜도 정확했다.
이 정도면 남편으로서 제법 훌륭한 일 처리를 한 셈이다.
사랑도 온라인 쇼핑처럼 주문과 배송으로 끝낼 수 있다면 얼마나 편리할까.
생일날 저녁, 식탁에는 케이크가 놓이고 가족들의 축하 노래가 이어졌다.
아내는 선물을 받고 고맙다고 웃었다.
그런데 문득 아내가 물었다.
“당신은 내가 요즘 뭘 제일 좋아하는지 알아?”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좋아하는 음식은 알고 있다.
자주 가는 마트도 알고, 휴대전화 비밀번호도 안다.
그런데 요즘 아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는 선뜻 떠오르지 않았다.
아내가 원한 것은 선물의 가격보다
자신에게 얼마나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지에 대한 대답이었는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가족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착각하며 산다.
오랜 세월 함께 살았다는 이유로 그 사람을 다 안다고 믿는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매년 달라진다.
스무 살에 좋아하던 것과 쉰 살에 좋아하는 것이 같을 리 없다.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인간관계를
‘나와 그것’, ‘나와 너’라는 두 가지 방식으로 바라보았다.
상대를 익숙한 역할이나 대상으로 대하는 것과,
고유한 인격을 가진 한 사람으로 만나는 것은 다르다는 이야기이다.
가족에게도 이런 차이가 있을 것이다.
아내를 집안일을 함께하는 사람으로 아는 것과,
아직도 새로운 꿈을 꾸고
때로는 혼자 외로워하는 한 사람으로 바라보는 것은 다른 일이다.
흥미롭게도 선물에 관한 심리학 연구에서는
선물하는 사람이 가격이 비쌀수록 상대가 더 고마워할 것이라 예상하지만,
받는 사람의 감사는 반드시 가격에 비례하지 않는다는 결과가 나왔다.
우리는 정성을 표현하려고 돈을 쓰지만,
정작 그 돈을 벌고 쓰느라 상대의 마음을 살필 시간을 놓치기도 한다.
그날 밤, 아내와의 사진들을 들여다보았다.
젊은 날 함께 걷던 거리, 아이가 태어나 서툴게 안고 있던 모습,
가족여행에서 혼자 짐을 챙기던 아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늘 곁에 있어서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장면들이었다.
다음 날 작은 편지지에 몇 줄을 적었다.
‘당신이 처음 한국에 왔을 때 모든 것이 낯설었을 텐데,
나는 내 생활에 익숙하다는 이유로 당신의 어려움을 충분히 살피지 못했어.
아이들을 키우며 힘들었던 날도 많았겠지.
이제 당신이 좋아하는 것과 앞으로 해보고 싶은 일을 더 많이 듣고 싶어.
생일 축하해.’
거창한 사랑 고백은 아니었다. 문장도 서툴렀다.
그런데 그동안 고맙다는 말 한마디로 뭉뚱그렸던 세월이
비로소 구체적인 얼굴을 갖기 시작했다.
가족의 생일은 단순히 한 살 더 먹은 것을 축하하는 날이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가 함께 보낸 시간 속에서 그 사람이 어떤 기쁨을 느꼈고,
어떤 어려움을 견뎌냈는지 다시 떠올리는 날일 수도 있다.
물론 선물이 필요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편지 한 장 내밀었다가 “그래서 선물은?”이라는 질문을 받으면 곤란하다.
마음도 중요하지만 현실 감각 역시 부부생활의 필수 덕목이다.
다만 케이크 위의 촛불은 금세 꺼지고 선물은 언젠가 낡는다.
그런데 자신도 잊고 있던 어느 날을 누군가 기억해 준다면,
그 기억은 오래 마음에 머물 것이다.
사랑은 상대를 오래 알고 있다는 자신감보다,
오늘의 그 사람을 다시 알아가려는 관심에 더 가까운 것인지도 모른다.
다가오는 가족의 생일에는
선물을 고르기 전에 먼저 지난 시간을 한번 떠올려 보고 싶다.
그 사람이 가장 환하게 웃었던 순간, 말없이 힘들어했던 날,
그리고 내가 미처 알아주지 못했던 마음을.
어쩌면 생일에 가장 듣고 싶은 말은 이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당신과 함께한 그날을 아직 기억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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