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례식장에서 돌아오는 길이면 내가 했던 말을 되짚게 된다.
“힘내.”
“잘 챙겨 먹고.”
“시간이 지나면 조금 괜찮아질 거야.”
마음은 진심이었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 생각하면 어딘가 걸렸다.
말없이 있자니 무심해 보일까 걱정되고,
무슨 말을 하자니 아는 말이 부족했다.
어른이 되면 위로도 능숙해질 줄 알았는데,
나이를 먹을수록 함부로 꺼내기 어려운 말이 늘어난다.
박완서의 《한 말씀만 하소서》는 그 막막함 앞에서 펼치게 되는 책이다.
아들을 잇달아 잃은 저자가 감당하기 어려운 슬픔을 담은 기록이다.
책 속에서 작가는 자기 마음을 단정하게 정리하지 않는다.
절대자를 향해 분노하고, 이유를 묻고,
살아 있는 자신을 견디기 어려워한다.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래야 한다는 모범적인 표정도 없다.
나는 그 정직함 앞에서 잠시 멈춘다.
슬퍼하는 사람에게 우리가 은근히 요구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돌아보게 되기 때문이다.
너무 오래 울지 않기를, 일상으로 돌아오기를,
언젠가는 그 일에서도 의미를 찾기를 바란다.
위로한다고 생각하면서 슬픔이 보기 편한 모습이 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의 죽음은 남은 사람을 성장시키기 위해 일어난 사건이 아니다.
고통에서 무엇을 배웠느냐는 질문보다 먼저,
그 사람이 얼마나 보고 싶은지를 말할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책을 읽으며 내게 남은 것은 슬픔과 살아 있음이
한 사람 안에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마음은 무너져 있는데 몸은 허기를 느낀다.
잠시 웃었다가도 다시 울게 된다.
그런 순간을 두고 이제 괜찮아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
밥을 먹는다고 잊은 것이 아니고, 웃는다고 사랑이 줄어든 것도 아니다.
살아 있는 몸이 하루를 이어가는 동안에도 그리움은 제자리에 남아 있을 수 있다.
나는 종종 사람의 마음을 너무 빨리 해석했다.
연락이 뜸하면 혼자 있고 싶겠거니 했고,
웃는 모습을 보면 많이 나아졌겠거니 했다.
상대가 말해주기도 전에 내 쪽에서 슬픔의 진행 상황을 정리한 셈이다.
박완서의 기록은 내게 그 서두름을 내려놓게 한다.
타인의 고통을 온전히 안다고 말할 수는 없어도,
모르는 채로 곁에 있을 수는 있다.
설명을 찾지 못한 사람에게 또 다른 설명을 보태기보다
그 사람의 말을 기다리는 것이다.
얼마 전, 오랫동안 연락하지 못했던 지인에게 문자를 쓰다가 지웠다.
잘 지내느냐는 인사가 그날따라 어려웠다.
잘 지내지 못해도 대답할 수 있는 말을 보내고 싶었다.
한참 망설이다 이렇게 썼다.
“문득 생각나서 연락했어. 답장은 천천히 해도 돼.”
며칠 뒤 답장이 왔다.
여전히 힘들지만 생각해줘서 고맙다는 말이었다.
나는 좋은 문장을 찾아내려 애쓰지 않고,
다음 주에 잠깐 만나도 괜찮겠느냐고 물었다.
《한 말씀만 하소서》를 나는 슬픔을 끝내는 방법보다
슬픔을 지닌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묻는 책으로 읽는다.
시간이 흘렀다는 이유로 마음까지 정리되기를 요구하지 않는 태도 말이다.
오늘도 누군가는 아무 일 없는 얼굴로 아주 큰 부재를 견디고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을 만나면 말을 조금 아끼고 싶다.
떠난 이의 이야기가 나오면 화제를 돌리지 않고 듣고 싶다.
함께 울 수도, 잠깐 웃을 수도 있는 시간을 내어주고 싶다.
슬픔에는 마감일이 없지만, 곁에 앉을 약속은 내가 정할 수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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