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책 수선소』제9화 — 책이 떠난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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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후가 밀어놓은 휴대전화는 해수의 공책 옆에 있었다.

사진 속 토끼는 열린 문을 향해 서 있었다. 해수는 화면을 확대하려다 손을 거두었다. 소년이 자기 전화기에 손을 대는 것을 싫어할 수도 있었다.

“좀 크게 봐도 돼?”

지후가 손가락 두 개로 화면을 벌렸다. 집의 창문이 커지면서 토끼의 뒷발이 화면 밖으로 사라졌다.

“아니, 아까처럼.”

소년이 사진을 줄였다. 토끼는 다시 길 위에 섰다.

해수는 공책의 세 번째 문장을 읽었다. 이름을 불러주기를 기다렸다고 써놓고, 그다음에는 아무것도 정하지 못했다. 지후는 내일 다시 와도 된다고 했다. 소년에게는 쉬운 말처럼 들렸지만 해수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한 번 들어가지 못한 문 앞에 다시 서는 일이 어떤 것인지 생각하다가 펜 뚜껑을 닫았다.

그때 곽 노인이 동화책을 작업대 가운데로 가져왔다.

“다 됐어.”

지후가 휴대전화를 집어 들고 일어났다.

노인은 수선한 페이지를 펼쳤다. 들떴던 종이는 제법 평평해졌고 토끼 발밑의 그림도 이어져 있었다. 다만 가느다란 선 하나가 남았다. 지후는 몸을 숙여 그 선을 보았다.

“넘겨도 돼요?”

“천천히.”

소년은 페이지 아래를 받쳐 넘겼다. 마지막 그림 앞에서 멈췄다가 다시 덮었다.

“오늘 가져가요?”

“네 시에.”

벽시계는 두 시 사십 분을 가리켰다. 지후는 의자에 걸어놓은 배낭을 보았다.

그러고는 작업대에서 조금 물러났다.

해수는 공책을 가방에 넣었다. 오늘은 쓰지 못한 채 돌아가겠구나 싶었지만, 어제처럼 다른 일을 놓치고 싶지는 않았다. 저녁 반찬을 사기로 했고 아내가 보낸 목록도 있었다.

지후가 물었다.

“뭐 할 거 있어요?”

곽 노인은 선반 아래의 작은 상자를 가리켰다.

“빈 봉투 크기대로 넣어. 구겨진 건 빼고.”

소년은 상자를 가져와 앉았다. 해수도 맞은편에서 봉투를 나누었다. 책을 넣었던 봉투에는 모서리가 눌린 자국이 남아 있었다. 지후는 찢어진 곳을 안쪽에서도 확인한 뒤 버릴 것과 쓸 것을 갈랐다.

세 시가 넘자 전화기가 한 번 울렸다. 소년은 화면을 보더니 엎어놓았다.

해수는 누구냐고 묻지 않았다. 얼마 뒤 지후가 다시 화면을 확인하고 짧게 답장을 썼다.

손님은 네 시보다 조금 일찍 왔다.

천 가방을 든 여자를 보고 지후가 봉투에서 손을 뗐다. 곽 노인은 작업대의 다른 책을 치우고 동화책을 펼쳤다. 여자는 수선한 부분을 가까이 들여다보았다. 손끝으로 만지려다 노인을 보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는 찢어졌던 선을 아주 가볍게 쓸었다.

“여기였죠.”

“응.”

첫 장을 펼치자 오래전 글씨가 나왔다. 여자는 그것을 보고 작게 숨을 내쉬었다.

“글씨는 그대로네요.”

“그건 안 건드렸어.”

해수는 여자가 책을 덮을 때까지 기다렸다.

“다시 죄송합니다.”

여자는 고개를 들었다.

“다음에는 조심해주세요.”

“네.”

괜찮다는 말은 없었다. 해수는 대답한 뒤 더 설명하지 않았다.

곽 노인이 의뢰서를 확인하는 동안 지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배낭을 집으려는 줄 알았는데 소년은 작업대 옆으로 다가왔다.

“제가 가져가려고 했어요.”

여자가 지후를 보았다.

“이 책을?”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죄송해요.”

해수는 손에 들고 있던 봉투를 내려놓았다. 곽 노인도 펜을 멈췄다.

여자는 지후의 얼굴과 책을 번갈아 보았다.

“사진 찍고 싶다고 했던 학생이구나.”

“네.”

“다음에는 물어봐요. 이건 우리 집 책이라서.”

지후는 입술을 눌렀다가 고개를 숙였다.

여자는 책을 천 가방에 넣었다. 계산을 마치고 나갈 때 소년이 한쪽으로 비켜섰다. 작은 종이 울렸다. 해수는 유리문 너머로 천 가방이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작업대에는 책 모양으로 비어 있는 자리가 남았다.

지후는 봉투를 마저 정리했다. 해수는 사과를 잘했다고 말하려다 소년이 봉투를 상자에 넣는 것을 도왔다. 지후가 원해서 한 말을 자신이 평가하는 것은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곽 노인이 일한 시간을 적고 돈을 건넸다. 소년은 받아 주머니에 넣었다.

“월요일에도 와도 돼요?”

노인이 의뢰서를 묶으며 물었다.

“일하러?”

“네.”

“오면 먼저 물어봐. 할 일 있는 날도 있고 없는 날도 있어.”

“알았어요.”

지후는 배낭을 메고 나갔다. 해수도 남은 정리를 마쳤다. 월요일에는 자신도 한 시에 출근했다. 소년이 몇 시에 올지 궁금했지만 이번에는 묻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리지 않았다.

다섯 시가 되자 가방을 들었다. 장을 보려면 큰길 쪽으로 가야 했다.

수선소에서 두 골목쯤 지나는데 지후가 보였다. 문 닫은 세탁소 앞에 앉아 휴대전화를 보고 있었다. 해수는 걸음을 늦췄다.

“아직 여기 있었어?”

소년이 급히 화면을 껐다.

“친구 기다려요.”

해수는 대답을 듣고도 잠깐 서 있었다. 지후의 배낭이 발목 사이에 놓여 있었다. 앞주머니 지퍼가 벌어져 비닐에 감싼 옷이 보였다.

“늦게 와?”

“좀요.”

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부터 기다렸느냐고 물으면 소년이 또 입을 닫을 것 같았다.

“난 장 보고 갈 거야.”

“네.”

몇 걸음 가다 돌아보니 지후는 다시 전화기를 켜고 있었다. 얼굴 가까이 든 화면에 집과 토끼가 작게 보였다.

해수는 마트에서 아내가 보낸 목록을 열었다. 두부와 대파, 달걀을 차례로 담았다. 라면 진열대 앞에서 멈췄다가 바구니를 내려다보았다.

소년이 저녁을 먹었는지는 모른다. 먹지 않았다고 해서 자신이 무엇을 사다 주어도 되는지는 더 몰랐다.

그는 계산을 마치고 나오며 아내에게 전화를 했다.

“장 봤어. 조금 늦을 것 같아.”

“왜?”

해수는 세탁소 쪽으로 이어지는 골목을 보았다.

“아는 애가 혼자 앉아 있어서.”

“무슨 일인데?”

“아직 몰라. 한번 물어보고 갈게.”

전화를 끊고 골목으로 돌아갔다. 지후는 같은 자리에 있었다.

해수는 소년 앞에서 멈춰 섰다.

“옆에 잠깐 앉아도 돼?”

(10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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