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늦은 밤,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을 켭니다. 카톡 친구 목록을 쭉 내리다 보면
그 수가 수백을 훌쩍 넘어가는데, 정착 마음은 헛헛하다.
“나 오늘 좀 힘들어.” “그냥 네 목소리가 듣고 싶었어.”
“별 일은 아닌데, 그냥 이야 좀 하고 싶어.”
이렇게 체면 차리지 않고 전화를 걸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우리는 참 많은 사람과 연결되어 살아간다.
카톡으로 안부를 묻고 SNS에 사진을 올리고 ‘좋아요’를 누르고,
단체톡방에서 이모티콘을 날린다.
아침부터 밤까지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마음 깊은 곳에서는 점점 더 외로워진다.
연결은 많아졌는데, 마음은 더 고립된 시대, 참 묘한 세상인 것 같다.
회사에서는 멀쩡한 얼굴로 “네 알겠습니다.”,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좋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어른다운 말을 한다.
집에 와서는 가족에게 “괜찮아”라고 말한다.
그런데 정착 내 마음을 들어다보면 괜찮지 않은 날이 더 많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걱정 하나, 괜히 서운한 마음 하나, 나만 뒤쳐진 것 같은 불안 하나.
가끔은 그 모든 것을 설명하지 않아도
그냥 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한 명쯤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럴 때 나는 옛 어른의 문장을 찾아 읽는다.
그 중에서도 오래 마음에 남는 시가 있다.
함석한 선생의 <그대 그런 사람을 가졌는가>
시인은 우리에게 묻는다.
만 리 길을 떠나면서 내 가족을 맡겨도 마음 놓을 사람,
온 세상이 나를 버렸을 때도 ” ‘저 맘이야’ 하고 믿어지는 사람”
그리고 더 깊은 질문을 던진다.
침몰하는 배에서 하나뿐인 구명대를 내어주며
“너만은 살아다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있느냐고 묻는다.
읽다가 문득 나도 모르게…
‘잠깐만요.’ ‘구명대까지 양보해야 합니까?’
요즘은 충전기 하나 빌려줘도 돌려받을 때까지 마음이 불안할 때도 있는데…
하지만 웃고 넘기기에는 그 질문이 참 오래 남는다.
“나는 그런 사람을 가지고 있는가?”
그리고 조금 더 깊이 생각해본다.
“나는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인가?”
이 질문 앞에서는 괜히 말이 없어진다.
어쩌면 우리가 찾는 그 한 사람은
내가 먼저 되어야 하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특히 가족은 그렇다.
부부가 된다는 것은
한 집에서 살며 치약을 같이 쓰고 관리비를 나눠 내는 생활동맹이 아니다.
물론 현실에서는 치약 하나 때문에도 의견 충돌이 일어난다.
양말을 뒤집어 벗어놓았다고 잔소리를 하고, 휴대폰만 본다고 서운해하고,
말 한마디 예쁘게 하지 않았다고 하루 종일 마음 불편해 한다.
그런데도 다음 날 아침이면 다시 밥을 차려준다.
가족이 가족인 것은 완벽해서가 아니라
서로의 부족함을 너무 잘 알면서도
결국 다시 곁에 남아주는 관계이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나이를 먹을수록 중요한 것은 친구의 숫자가 아니라 관계의 깊이인 것 같습.
명함이 몇 장 있는지가 아니라 내가 아플 때 찾아올 사람이 누구인지가 중요해진다.
SNS의 좋아요 숫자가 아니라 내가 아무 말 없이 한숨 쉬었을 때
“무슨 일 있어?”라고 물어봐 줄 사람이 중요하다.
이 팍팍하고 차가운 세상에서 내가 먼저 내 곁의 사람에게 ‘그런 사람’이 되어주면 어떨까?
방황하고 상처받은 지인엑데 기꺼이 어깨를 내어주고, 묵묵히 같이 비를 맞아주는
느슨하지만 따뜻한 연대, 거창할 것 없지만 그것이 시작이 아닐까.
오늘 저녁, 꼰대 같은 훈계는 접어두고 당신 곁에서 묵묵히 하루를 견뎌낸
아내에게, 남편에게 그리고 자녀에게 이 한마디만 건네보자.
“오늘 하루도 수고했어.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무조건 네 편이야”
다정함은 체력에서 나온다지만,
진짜 위로는 내가 먼저 내미는 작은 손길에서 시작된다.
따뜻한 밥 한 끼 마주하고 앉아,
서로가 서로에게 ‘그런 사람’이 되어주는 다정한 밤이 되기를 진심으로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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