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퇴근길 지하철 창문에 얼굴이 비쳤다.
아침에 분명 다림질한 셔츠를 입었는데 저녁의 나는
어디서 한 차례 구겨져 나온 사람 같았다.
셔츠만 구겨진 것이 아니었다.
회의에서 삼킨 말과 거래처에 숙인 고개가 마음에도 주름을 만들었다.
젊었을 때는 사회생활을 시작하면 어른이 되는 줄 알았다.
막상 들어와 보니 모르는 것을 들키지 않는 기술부터 익혀야 했다.
전화 한 통 받는 데도 심호흡이 필요했고,
상사의 “잠깐 봅시다”에는 온갖 잘못이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돌아오는 길에 듣던 노래가
봄여름가을겨울의 〈브라보 마이 라이프〉였다.
2002년에 발표된 이 곡은 내게 조금 거친 건배사처럼 들렸다.
잘 풀린 일이 별로 없는 날에도 내 인생을 향해 잔을 들어주는 목소리였다.
술을 못하는 나는 캔커피로도 충분했다.
축하할 성과는 없어도 오늘 하루를 어떻게든 마쳤다는 이유가 있었다.
그때는 이 노래를 들으며 언젠가 근사해질 나를 응원했다.
조금만 더 버티면 남들 앞에 내놓을 만한 인생이 될 것이라 믿었다.
번듯한 직함과 넉넉한 통장, 가족에게 큰소리칠 수 있는 자신감까지.
박수를 받을 자격은 그런 것들이 갖춰진 뒤에 생기는 줄 알았다.
세월이 흘렀다.
직함은 생겼지만 마음은 여전히 불안했고,
월급이 오르면 지출도 성실하게 따라 올라왔다.
인생은 내가 승진하는 속도에 맞춰 난이도를 조정하는 듯했다.
어느 날 다시 이 노래를 듣다가 문득 생각했다.
나는 도대체 언제쯤 내 삶을 축하할 작정이었을까.
작가 올리버 버크먼은 《4000주》에서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이 유한하며,
하고 싶은 모든 일을 다 해낼 수는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서
삶을 바라보는 전환이 시작된다고 이야기한다.
그 생각을 따라가니 내 습관 하나가 보였다.
나는 늘 오늘을 나중의 행복을 위한 준비 기간으로 취급했다.
일이 안정되면, 아이들이 자라면,
돈 걱정이 줄면 그때 좀 살아보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준비하는 동안에도 내 인생은 매일 지나가고 있었다.
첫 월급으로 어머니께 내복을 사드린 날,
아내와 값싼 식당에 앉아 앞으로의 살림을 의논하던 밤,
열이 난 아이 옆에서 번갈아 눈을 붙이던 새벽.
그때는 정신없이 지나쳤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 안에 내가 지키고 싶었던 삶이 있었다.
지하철에서 노래가 끝났다.
창문에 비친 얼굴을 다시 보았다.
여전히 피곤했고 눈가에는 주름이 깊었다.
그래도 그 얼굴을 조금 오래 바라보았다.
저 사람도 꽤 애쓰며 여기까지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살아온 날을 인정한다고 잘못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가족에게 함부로 했던 말도 있고,
두려워서 놓친 기회도 있다.
미안한 일에는 사과하고, 고칠 일에는 손을 대야 한다.
다만 그것을 하면서도 나를 온통 실패한 사람으로 몰아붙이지는 않아도 될 듯했다.
집에 돌아와 아내에게 말했다.
“오늘도 고생했어.”
아내가 나를 보고 웃었다.
“당신도.”
우리는 특별한 일을 이루지 못한 날에도
서로의 수고를 알아줄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젊을 때 〈브라보 마이 라이프〉는 앞으로 나아가라는 응원으로 들렸다.
이제는 잠깐 돌아서서 지나온 나에게도 박수를 보내라는 말처럼 들린다.
오늘 밤에는 물 한 잔을 들 생각이다.
잔을 높이 들면 아내가 왜 그러느냐고 물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아내가 왜 그러느냐고 물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조금 쑥스럽게 대답할 것이다.
“그냥, 우리 여기까지 사느라 수고했다고.”
그 정도면 오늘의 건배사로 충분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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