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나이에, 아직 설레도 되는가 -조용필 〈바운스〉가 내 안의 초보자에게 건네는 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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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강좌의 신청 화면을 열어놓고 한참을 망설였다.

이름과 전화번호만 적으면 되는데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다.

젊은 사람들이 많으면 어떡하지. 내 글을 읽고 웃으면 어떡하지.

수강료보다 체면을 더 비싸게 계산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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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화면을 들여다보더니 물었다.

“쓰고 싶다며. 왜 안 해?”

“이 나이에 뭘 새로 배우겠어.”

말하고 나니 제법 그럴듯했다.

나는 나이를 이유로 꿈을 접는 데 어느새 전문가가 되어 있었다.

새로운 앱 하나 익히기는 귀찮으면서,

포기할 명분은 빠르게 업데이트하는 중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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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라디오에서 음악이 들렸다. 조용필의 〈바운스〉였다.

발끝이 먼저 박자를 탔다.

마음은 늙었다고 우기는데 몸 한쪽은 아직도 음악을 알아듣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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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조용필은 예순을 넘긴 나이에 19집 《Hello》를 내놓았다.

먼저 공개된 〈바운스〉는 주요 음원차트 정상을 휩쓸었다.

오래 사랑받아온 가수가 새 노래로 젊은 청중에게까지 다가간 사건이었다.

나는 그때의 놀라움을 기억한다.

익숙한 목소리인데, 음악은 새로웠다.

추억을 만나러 갔다가 뜻밖에 오늘을 만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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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를 떠올리니 신청 화면 앞의 내가 조금 우스워졌다.

가왕도 새로운 노래를 세상에 내놓는데,

나는 아직 아무도 읽지 않은 글의 평가부터 걱정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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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누구나 조용필처럼 될 수는 없다.

나이가 들면 체력도 달라지고, 책임도 늘어난다.

하고 싶다는 마음만으로 모든 일이 가능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현실을 헤아리는 일과 나를 미리 끝난 사람으로 취급하는 일은 다르다.

나는 그 둘을 자주 섞어놓고 신중함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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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수업 날, 가방에 공책을 넣었다.

회사 회의에 들어갈 때보다 긴장되었다.

자기소개 차례가 다가오자 괜히 펜 뚜껑만 열었다 닫았다.

오랫동안 누군가의 보고를 받던 사람이,

이제는 자신의 서툰 문장을 읽어야 했다.

“글을 써보고 싶어서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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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말을 하는데 목이 조금 말랐다.

강사는 고개를 끄덕였고, 옆자리 사람은 자신도 처음이라고 웃었다.

내가 걱정했던 심사위원들은 없었다.

각자의 이유로 공책을 펼친 사람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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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야 알았다.

나를 가장 엄격하게 심사하던 사람은 나였다.

젊었을 때는 몰라도 되는 일이 많았는데,

중년이 되자 모르는 모습을 들키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경험이 쌓인 만큼 초보자가 될 자유는 줄어든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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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운스〉를 이제 나는 그 자유를 되찾는 노래로 듣는다.

사랑 앞에서 두근거리는 마음을 노래하지만,

내게는 낯선 문을 열 때의 떨림으로도 다가온다.

살아 있다는 것은 익숙한 일을 능숙하게 해내는 것만이 아니다.

잘할지 모르면서도 해보고 싶은 일이 남아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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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아내에게 전화했다.

“어땠어?”

“별것 안 했어. 내 글 읽었어.”

그렇게 말했지만 별것이었다.

몇 번이나 지우려던 문장을 끝까지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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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도착해서도 공책을 가방에 넣지 않고 식탁 위에 펼쳐놓았다.

아들이 지나가며 무슨 글이냐고 물었다.

예전 같으면 다 쓰고 보여주겠다고 했을 것이다.

그날은 의자를 하나 당겼다.

“아직 서툰데, 한번 들어볼래?”

아이가 앉기를 기다리는 동안 심장이 조금 빨라졌다.

이번에는 그 두근거림을 나이 탓으로 돌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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