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책 수선소』 제1화 이름을 적는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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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람은 석 달째 꺼져 있었다. 그런데도 서해수의 눈은 매일 여섯 시 반이면 저절로 떠졌다.

삼십 년 가까이 몸에 새겨진 시계는 사직서를 냈다고 해서 멈춰 주지 않았다.

옆자리에서 아내가 몸을 돌렸다. 해수는 조심스레 거실로 나왔다. 식탁 의자에는 어제 벗어놓은 셔츠가 걸려 있었다.

출근할 곳도 없으면서 다림질까지 한 셔츠였다.

커피를 타다가 싱크대의 프라이팬을 보았다. 물에 불려놓은 바닥에 달걀 조각이 붙어 있었다.

“이건 먹고 바로 닦아야 잘 닦이는데.”

주방으로 나온 아내가 냉장고 문을 열다 손을 멈췄다.

“그러면 당신이 닦아주면 되지.”

“그냥 그렇다는 거야.”

“나도 그냥 그렇다는 거야.”

해수는 프라이팬을 집어 들었다. 수세미로 문지르자 달걀이 쉽게 떨어졌다.

“점심은 어떻게 할 거야? 나 오전부터 나가야 해서.”

“대충 먹지, 뭐.”

“밥은 있어. 냉장고에 국도 있고.”

아내는 그의 손에서 프라이팬을 받아 건조대에 세웠다. 식탁의 우편물을 모으자 관리비 고지서가 맨 위에 올라왔다.

해수는 숫자가 보이지 않도록 뒤집었다가, 아내가 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다시 돌려놓았다.

“오후에는 좀 걸어. 하루 종일 앉아 있으면 더 처져.”

“내가 언제 하루 종일 앉아 있었다고.”

말이 생각보다 날카롭게 나왔다. 한동안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만 들렸다.

“알았어. 그냥 걱정돼서 한 말이야.”

해수는 사과 대신 수도꼭지를 틀었다. 이미 깨끗해진 싱크대를 한 번 더 헹궜다. 아내가 나간 뒤에도 물기는 한참 남아 있었다.

갈 곳이 없다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면 너무 천천히 걸어서는 안 됐다.

해수는 지하철역 쪽으로 걷다 방향을 틀었다. 출근하는 사람들 틈에서 혼자 두 손이 비어 있는 것이 어색했다.

서류 가방을 가져올 걸 그랬다고 생각하다 피식 웃었다. 빈 가방까지 들면 정말 출근하는 사람처럼 보일 터였다.

큰길을 벗어나자 오래된 상가들이 나왔다.

닫힌 세탁소와 임대 안내가 붙은 반찬가게 사이로 좁은 골목이 이어졌다.

같은 동네에서 십 년 넘게 살았는데도 회사와 집 사이에 없는 길은 낯설었다.

골목 끝 유리문에 종이 한 장이 붙어 있었다.

오후에 책 정리 도와주실 분.

전화번호의 마지막 두 자리는 햇빛에 바래 희미했다. 고개를 들자 간판이 보였다.

오래된 책 수선소.

창 안의 책들은 흰 종이띠에 묶여 있거나, 표지와 속장이 떨어진 채 누워 있었다. 문을 열자 작은 종이 울렸다.

작업대의 노인이 눈을 들었다. 회색 마스크 위로 흰 눈썹이 길었다.

“책 가져왔어?”

“아뇨. 문에 붙은 것 보고요.”

“정리하는 일인데.”

“그 정도는 할 수 있습니다.”

대답이 너무 빨랐다. 해수는 목을 가다듬었다.

“제가 회사에서 삼십 년 가까이 근무했고요. 마지막에는 관리부 쪽에서—”

노인이 옆의 의자를 발로 밀어주었다.

“앉아.”

해수는 말을 멈추고 앉았다. 작업대에는 붓과 실타래, 끝이 둥근 도구가 놓여 있었다.

풀 접시에서 희미하게 밀가루 냄새가 났다. 노인은 찢어진 책장 밑에 받침을 넣고 가는 종잇조각에 풀을 발랐다.

면접이라면 경력을 더 물어야 할 것 같았지만 노인은 책만 보았다.

“책을 따로 배워야 합니까?”

“수선은 내가 해. 처음엔 정리만.”

“잘못 건드리면 안 되겠네요.”

“그러니까 모르면 물으면 돼.”

노인은 붓을 내려놓았다.

“오후 한 시부터 다섯 시. 일주일에 세 번. 무거운 책 상자도 옮겨야 하고.”

품삯을 듣고 해수는 한 달 치를 계산했다. 예전 월급과 비교하려다 그만두었다.

“언제부터 하면 될까요?”

“오늘 바빠?”

확인할 일정은 없었지만 휴대전화를 한번 들여다보았다.

“아닙니다.”

노인이 공책을 건넸다.

“그럼 이름하고 전화번호 적어.”

날짜와 이름, 숫자가 몇 줄 적혀 있었다. 직장에서도 이런 공책을 썼다. 그때 그는 직원들의 출근 시간을 확인하는 사람이었다.

“이름은 서해수입니다.”

“나는 곽 씨.”

해수는 자신의 이름 세 글자를 적었다. 옆에 버릇처럼 직함을 쓰려다 펜을 멈췄다. 전화번호를 적은 뒤 공책을 돌려주었다.

(2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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