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내가 코를 골기 시작하면 나는 천장을 바라본다.
낮에는 내 이야기를 조용히 들어주던 사람이 불을 끄면 혼자 긴 연설을 시작한다.
“여보, 조금만 돌아누워 봐.”
잠시 고요해진다. 이제 잘 수 있겠다 싶으면 다시 시작이다.
부부의 침대에도 소음 분쟁 조정위원회가 필요한 밤이다.
다음 날 아침, 억울한 얼굴로 한마디 한다.
“당신 코골이 때문에 어젯밤에도 고생했어.”
아내가 나를 빤히 본다.
“당신은 안 고는 줄 알아?”
나는 내가 자는 모습을 본 적 없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무죄를 주장해왔다.
증인이 바로 옆에 있는데도 말이다.
함께 산 세월이 길어지면 배우자의 단점에 관한 기억력이 유난히 좋아진다.
치약 뚜껑을 열어두는 버릇, 같은 말을 되묻는 습관,
빨래통 바로 옆에 양말을 떨어뜨리는 정확성까지.
고마웠던 일은 잊으면서 이런 것은 빠짐없이 기억한다.
사랑해서 함께 살기 시작했는데 어느새 서로의 생활을 채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 밤이었다.
하루 종일 밖에서 일한 아내가 늦은 저녁을 먹었다.
나는 식탁에 앉아 오늘 얼마나 피곤했는지 한참 이야기했다.
아내는 고개를 끄덕이다 먼저 방으로 들어갔다.
뒤늦게 누웠을 때 익숙한 코골이가 들렸다.
깨우려고 손을 뻗다가 이불 밖으로 나온 아내의 손을 보았다.
손끝이 거칠었고 손등에는 작은 상처가 있었다.
그제야 저녁 식탁이 떠올랐다.
나는 내 하루를 길게 말했지만 아내의 하루는 묻지 않았다.
내 피곤함에는 온갖 사연이 있었고,
아내의 피곤함에는 코골이라는 이름만 붙여놓았던 것이다.
철학자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사랑을 배우고 익혀야 하는 능력으로 바라본다.
그가 말하는 존중에는 상대를 있는 그대로 보고,
그 사람 고유의 모습을 알아주는 태도가 담겨 있다.
그 생각 앞에서 조금 찔린다.
나는 아내를 잘 안다고 믿었다.
좋아하는 음식과 싫어하는 말투를 알고 있으니 충분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오래 알고 지냈다는 사실이
오늘의 아내까지 저절로 알려주지는 않았다.
가장 가까이 누워 있으면서도
그 사람이 견딘 하루에는 멀리 떨어져 있었던 셈이다.
손을 거두고 이불을 덮어주었다.
코골이는 여전했다.
다만 오늘 이 사람도 어지간히 힘들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아내에게 물었다.
“어제 많이 힘들었어?”
아내는 다리가 좀 아팠다고 했다.
나는 설거지를 하겠다고 나섰다.
아내는 프라이팬부터 물에 담가달라고 했다.
사랑에도 실습이 있었다.
마음만 먹었다고 곧바로 능숙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프롬이 설명하는 성숙한 사랑은 각자의 개성을 지키면서 이루는 결합이다.
그 말을 우리 집에 가져오면,
아내는 아내로 살고 나는 나로 살면서도
서로의 피로를 외면하지 않는 일일 것이다.
하나가 된다는 말이 조금 다르게 들린다.
생각과 습관이 모두 같아질 수는 없어도,
힘든 날 돌아와 자기 사정을 말할 수 있는 사이.
상대를 내 기준에 맞추려던 손으로 그 사람의 짐을 조금 들어주는 사이이다.
물론 여전히 잠을 설치는 밤이 있다.
돌아누워 달라고 부탁하고,
아내는 내 양말을 빨래통에 넣어달라고 말한다.
한 사람만 참아서는 오래가기 어렵다.
서로의 불편을 듣고 조금씩 움직일 때 함께 살 자리가 넓어지는 것이다.
오늘 밤에도 아내가 코를 곤다.
나는 흘러내린 이불을 올려준다.
소리는 그대로인데
그 소리를 듣는 내 마음에는 아내의 하루가 함께 들어와 있다.
자장가로 들리는 밤은 아직 드물다.
그래도 가끔은 그 소리를 들으며 잠든다.
오늘도 우리 두 사람이 하루를 마치고
여기까지 돌아왔다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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