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즘 사람들의 삶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자면,
참으로 숨 가쁘고 안쓰럽다는 생각이 든다.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더 크고 화려한 아파트를 갖기 위해, 통장 잔고의 동그라미 숫자를 늘리기 위해,
혹은 누군가에게 과시할 만한 번듯한 명함을 얻기 위해 스스로를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다.
나에게도 그것이 정답인 줄 알고 아등바등 살아온 세월이 있었다.
하지만 쉰을 넘기고부터 였을까.
그토록 기를 쓰고 움켜쥐려 했던 돈도, 알량한 명예도, 남들 눈치 보며 지켜냈던 체면도
결국은 해 질 녘 스쳐 지나가는 한 줄기 바람처럼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서운하지만, 인생이 원래 그렇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천상병 시인은 <귀천>에서 삶과 죽음이라는 인간의 가장 무겁고 두려운 숙제를 이토록 가볍고 초연하게 노래했다.
사실 천상병 시인의 삶을 반추해 보면,
그의 일생은 결코 한가로운 봄날의 소풍이 아니었다.
억울하게 연루된 동백림 사건으로 모진 고문을 당해야 했고,
그 지독한 후유증으로 평생을 육체의 병마와 지독한 가난에 시달렸다.
세상의 세속적인 잣대로 평가하자면,
상처투성이에 철저히 실패한 인생이라고 손가락질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짐승처럼 내몰린 처절한 고통과 부조리 속에서도
세상을 향해 핏대를 세우며 원망하는 대신, 삶을 향해 맑고 투명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상처마저도 껴안아버리는 이 거대한 긍정의 힘은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그것은 바로 시인이 자신의 삶을 움켜쥐고 통제해야 할 ‘소유’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고,
잠시 머물다 가는 ‘소풍’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소풍을 떠나는 아이는 결코 무거운 짐을 짊어지지 않는다.
그저 따스한 햇살 한 줌, 뺨을 스치는 시원한 바람 한 점,
그리고 곁에 있는 이와의 정겨운 웃음소리에 온 마음을 내어줄 뿐이다.
소풍은 언젠가 끝이 나고 우리는 본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야 하는 법이다.
집착과 욕심으로 배낭을 무겁게 채우면 채울수록,
그 짐에 짓눌려 정작 소풍 길의 아름다운 풍경은 놓치고 고달파지기 마련이다.
세월을 조금씩 더 살아가며 자연스레 깨닫게 된 것이 있다.
평생을 남과 비교하며 더 높은 곳으로 오르려 발버둥 치지만,
결국 마지막 순간에 남는 질문은 “내가 얼마나 가졌는가” 혹은 “얼마나 높은 자리에 올랐는가”가 아닐 것이다.
오직 “내가 내 삶을 얼마나 온전히 사랑했는가”하는 묵직하고도 본질적인 물음만이 남는다.
우리는 모두 이 푸른 별에 잠시 놀러 온 찰나의 여행자들이다.
언젠가 해가 저물고 먼 길을 돌아가야 할 시간이 오면,
입고 있던 무거운 외투도, 훈장처럼 자랑스레 달고 있던 직함도 모두 대지 위에 조용히 내려놓아야만 한다.
그러니 지금 당장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서 너무 아파하거나,
남보다 뒤처지는 것 같아 조급해할 일이 아니다.
조금 덜 가졌다고 해서 우리의 소풍이 초라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진정한 의미의 성공은 남들이 우러러보는 바벨탑을 쌓는 것이 아니라,
떠나는 날 “참으로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이었다”라고 담담히 웃으며 회고할 수 있는 내면의 평화에 있다.
오늘 하루, 곁에 있는 사람의 따뜻한 온기를 느끼고
길가에 핀 작은 꽃송이에 다정한 눈길을 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우리의 인생이라는 소풍은 충분히 눈부시고 가치 있는 여정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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