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내가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저녁을 먹고 소파에 앉아 TV를 보던 나는
부엌에서 들려오는 그릇 소리에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아내는 아무 말 없이 접시를 씻고 있었다. 조금 미안해졌다.
그렇다고 벌떡 일어나지는 않았다.
인간의 양심과 엉덩이 사이에는 생각보다 깊은 갈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때 TV에서 임영웅의 〈이제 나만 믿어요〉가 흘러나왔다.
잔잔한 피아노 선율 위로 따뜻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오랜 시간 고생하고 눈물 흘린 사람에게 이제는 자신을 믿고 기대도 된다는 노래였다.
참 멋진 고백이다.
나도 한때는 그런 말을 제법 잘했다.
결혼하기 전에는 아내에게 세상의 모든 어려움으로부터 지켜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자 현실은 조금 달라졌다.
세상의 어려움은커녕 집 안의 고장 난 수도꼭지 하나에도 당황하는 남편이 되어 있었다.
사랑은 여전한데 실력이 약속을 따라가지 못한 셈이다.
임영웅의 〈이제 나만 믿어요〉는 화려한 기교보다
담백한 목소리로 사랑의 진심을 전하는 노래이다.
가사를 찬찬히 들으면 단순히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주겠다는 다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며 흘린 눈물과 견뎌온 세월을 알아주고,
앞으로는 슬픔보다 웃는 날이 많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
특히 사랑하는 사람이 걸어온 힘겨운 시간을 자신이 모두 대신할 수는 없지만,
남은 길만큼은 함께 걷겠다는 약속이 뭉클하게 다가온다.
노래는 사랑하는 사람의 지나온 삶을 먼저 헤아린다.
그리고 그 사람이 앞으로 혼자 아파하지 않기를 바란다.
사랑한다는 말보다 먼저 ‘당신도 참 고생 많았다’는 위로가 들리는 이유이다.
젊은 연인의 사랑 고백처럼 들리지만,
내게는 오래 함께 살아온 부부의 이야기처럼 다가왔다.
젊은 날의 사랑에는 미래가 많다. 함께 여행할 곳도, 이루고 싶은 꿈도 많다.
무엇보다 서로에게 보여주고 싶은 멋진 모습이 많다.
그러나 중년의 사랑에는 지나온 시간이 쌓여 있다.
아이를 키우며 잠 못 이루던 밤, 생활비가 부족해 한숨 쉬던 날,
부모님의 병원비를 걱정하던 순간,
서로에게 상처 주는 말을 내뱉고 돌아서서 후회했던 시간들이다.
그 모든 시간을 통과하고도
여전히 같은 식탁에 마주 앉아 있다는 것은 생각보다 대단한 일이다.
프랑스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은 사랑을 단순한 감정보다
상대와 함께 존재하려는 태도와 연결해 생각했다.
사랑은 기분이 좋을 때만 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삶에 기꺼이 자리를 내어주는 일이라는 뜻으로 읽힌다.
결혼생활도 그렇다.
오래된 부부에게 사랑은 점점 명사에서 동사로 바뀐다.
늦게 귀가하는 배우자를 위해 남겨둔 저녁밥,
아픈 날 말없이 건네는 약 한 봉지, 추운 아침 미리 켜놓은 보일러에도 사랑이 숨어 있다.
문제는 그런 사랑이 너무 익숙해져서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내가 매일 하는 일은 당연하게 여기면서
내가 가끔 설거지하면 스스로 훌륭한 남편이 된 듯 뿌듯해한다.
접시 몇 장 씻고 마음속에서는 벌써 모범 남편 표창장을 받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경제적인 자기만족이다.
그런데 노래를 듣다 보니 조금 부끄러워졌다.
‘이제 나만 믿어요’라는 고백은 아름답지만,
누군가에게는 꽤 무거운 약속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 흔들리고 지칠 때가 있는데
어떻게 아내의 모든 인생을 책임질 수 있겠는가.
오히려 내가 무너질 것 같은 날,
먼저 손을 내밀어 준 사람이 아내였던 순간이 더 많았다.
그러니 중년의 사랑 고백은 조금 달라져도 좋을 것 같다.
‘이제 나만 믿어요’라는 말에
‘나도 당신을 믿고 기대겠습니다’라는 마음을 더하는 것이다.
한 사람만 든든한 기둥이 되는 사랑이 아니라,
서로의 약한 부분을 받아주는 사랑 말이다.
그날 나는 결국 소파에서 일어났다.
부엌으로 가서 아내에게 말했다.
“내가 할게.”
아내는 잠시 나를 쳐다보더니 고무장갑을 건넸다.
감동적인 눈빛도 사랑스러운 미소도 없었다.
아마 속으로 ‘웬일이래?’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좋았다.
임영웅의 노래가 끝날 무렵, 나는 마지막 접시를 헹구고 있었다.
아내는 식탁에 앉아 잠시 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노래 속 약속이 조금은 이해되었다.
상대의 모든 슬픔을 없애줄 수는 없더라도, 오늘의 피로 하나쯤 덜어줄 수는 있는 것이다.
젊은 날에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별도 따다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은 높은 찬장에 있는 그릇을 꺼낼 때도 허리부터 걱정되는 나이이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하늘의 별이 아니라,
오늘 자신이 얼마나 수고했는지 알아주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내일도 내가 먼저 설거지를 할지는 장담할 수 없다.
아, 이래서 아내가 나를 전적으로 믿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오늘만큼은 자신 있게 말하고 싶다.
여보, 이제 나만 믿으라는 말은 차마 못 하겠지만,
적어도 오늘 설거지는 나만 믿어도 된다.
이 정도면 쉰 살의 사랑 고백으로도 꽤 괜찮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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