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랜만에 광화문 거리를 걸었다.
세종문화회관을 지나 덕수궁 돌담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빌딩은 높아졌고 카페도 많아졌지만,
오래된 가로수와 골목 어귀에는 어딘가 익숙한 분위기가 남아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이문세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옛사랑〉이었다.
노래는 조금 전까지 점심 메뉴를 고민하던 사람을 삼십 년 전 청춘으로 돌아가게 했다.
1991년 발표된 이문세의 7집에 수록된 〈옛사랑〉은
작사가이자 작곡가인 이영훈 특유의 서정적인 선율과
이문세의 담담한 목소리가 어우러져, 떠나간 사랑을 조용히 돌아보게 한다.
노래는 지나간 사람을 떠올리며 홀로 서성이던 기억에서 시작한다.
그리움과 후회가 교차하지만,
다시 만나겠다는 간절한 호소보다는
이미 멀어진 시간을 받아들이는 쓸쓸함이 깊게 배어 있다.
특히 마음에 남는 것은 옛사랑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사람은 떠났지만 함께 걸었던 거리와 나누었던 말,
그날의 공기까지 마음 어딘가에 남아 있다.
젊은 날에는 사랑이 끝나면 모든 것이 끝나는 줄 알았다.
세상이 무너진 것 같았고, 다시는 그런 사람을 만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런데 세상은 무너지지 않았다.
다시 누군가를 만나 사랑했고, 가정을 이루고, 아이들을 키우며 세월을 보냈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이 바빠 옛사랑을 떠올릴 여유조차 없었다.
그러다가 오래된 노래 한 곡이 불쑥 기억의 문을 연다.
그렇다고 지금도 그 사람을 사랑한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그리워하는 것은 옛사랑의 상대보다
그 사람을 사랑했던 시절의 자신인지도 모른다.
미래가 어떻게 펼쳐질지 몰랐지만 두려움보다 기대가 컸던 나,
작은 약속 하나에도 하루 종일 설레던 나,
가진 것은 별로 없었지만 마음만큼은 누구보다 풍족했던 나 말이다.
돌아보면 그때의 사랑도 완벽하지 않았다.
서로의 마음을 몰라 서운해했고, 자존심 때문에 사과하지 못했으며,
별것 아닌 오해를 크게 만들기도 했다.
그런데 세월은 참 능숙한 편집자이다.
민망했던 장면은 슬그머니 지우고,
아름다운 순간만 골라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묶어놓는다.
그래서 옛사랑은 실제보다 조금 더 아름답게 기억되는지도 모른다.
프랑스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는
작은 마들렌 과자가 오래전 기억을 불러오는 유명한 장면이 있다.
과자의 맛과 향이 잊고 있던 어린 시절을 되살리듯,
우리에게는 노래 한 곡이 기억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된다.
누군가에게는 김광석의 목소리이고, 누군가에게는 오래된 팝송이며,
나에게는 광화문에서 듣는 이문세의 노래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광화문을 걸으며 듣는 〈옛사랑〉은 유난히 특별하다.
같은 길 위에 지금의 나와 오래전의 내가 함께 서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문득 생각했다.
지나간 사랑을 아름답게 기억하는 것이 지금의 사랑을 소홀히 한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그 시절의 설렘과 서툶을 인정할 수 있을 때,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의 소중함도 더 깊이 이해하게 되는 것 아닐까.
누구에게나 과거는 있다.
그 과거에는 사랑했던 사람도 있고, 미안한 사람도 있고, 결국 이루지 못한 약속도 있다.
모든 기억을 지워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옛사랑을 잘 떠나보낸다는 것은 그 사람을 잊어버리는 일이 아니라,
함께했던 시간을 내 인생의 한 페이지로 받아들이는 일인지도 모른다.
덕수궁 돌담길을 벗어나며 휴대전화를 꺼냈다.
아내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오늘 저녁 뭐 먹을까?”
잠시 후 답장이 왔다.
“아무거나.”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메뉴가 등장했다.
피식 웃음이 났다.
오래된 노래 속 사랑은 아름답고 애틋하지만,
지금 내 곁의 사랑은 저녁 메뉴 하나를 두고 고민해야 하는 현실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현실이 싫지 않았다.
청춘의 사랑이 가슴을 뛰게 했다면,
지금의 사랑은 평범한 하루를 함께 살아가게 해주는 힘이기 때문이다.
광화문에는 여전히 옛사랑의 기억이 남아 있다.
하지만 오늘 내가 돌아갈 곳은 과거가 아니라 지금의 식구들이 기다리는 집이다.
그리운 사람은 추억 속에 남겨두고, 지금 곁에 있는 사람과 남은 계절을 살아가는 것.
어쩌면 나이 든다는 것은 그렇게 지나간 사랑을 미워하지 않으면서도
오늘의 사랑을 더 소중히 여기는 법을 배우는 일인지도 모른다.
광화문 거리를 지나며 마지막으로 뒤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옛사랑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한때 누구보다 뜨겁게 사랑했고, 서툴렀지만 열심히 살아왔던 젊은 내가 서 있었다.
마음속으로 그 시절의 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때 참 좋았다고.
그리고 그때의 너도, 지금의 나도 나름대로 잘 살아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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