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탁기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
빨랫감은 별로 없는데 마음이 복잡했다.
회사에서 들었던 서운한 말, 며칠 전 가족과 나눈 불편한 대화,
오래전 선택에 대한 후회까지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이런 생각도 세탁기에 넣고 돌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표준 코스로 한 시간만 돌리면 걱정은 빠지고, 후회는 헹궈지고,
상처는 탈수되어 나오는 것이다.
괜히 웃음이 났다.
세탁기 버튼을 누르고 거실에 앉았다.
물소리와 함께 빨랫감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때 문득 이적의 빨래가 생각났다.
2010년 발표된 이 노래는 이별 후의 공허함과 아픔을
빨래라는 평범한 일상에 담아낸 노래로,
참 절묘한 제목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 뒤에도 빨래는 해야 한다.
아무리 슬퍼도 옷은 더러워지고, 식사는 해야 하며, 다음 날 출근할 준비도 해야 한다.
세상은 내 마음이 아프다는 이유로 잠시 멈춰주지 않는다.
젊었을 때는 슬픔이 찾아오면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알게 된다.
세상은 무너지지 않고, 슬픔을 품은 사람이 다시 일어나 하루를 살아간다는 사실을.
중년의 슬픔은 특히 요란하지 않다.
직장에서 자신의 자리가 좁아지는 것을 느낀 날에도
집에 돌아오면 가족에게 밥은 먹었느냐고 묻는다.
오래 준비한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아도 다음 달 카드값을 계산한다.
울고 싶지만 울 시간도 부족하다.
감정에도 업무 순서가 있다면 내 마음은 늘 마지막 순번인 셈이다.
그런데 이적의 노래를 듣다 보면 조금 다른 생각이 든다.
빨래를 한다고 옷에 묻었던 모든 흔적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래된 얼룩은 남기도 하고, 아무리 정성껏 빨아도 새 옷으로 돌아가지는 않는다.
우리 마음도 그렇지 않을까.
세월이 흐른다고 모든 상처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잊었다고 생각했던 일이 어느 날 갑자기 떠올라 마음을 아프게 할 때도 있다.
그렇다고 아픈 기억을 품고 살아가는 인생이 잘못된 것은 아닐 것이다.
흥미롭게도 청소와 스트레스의 관계를 살펴본 심리학 연구에서는
청소 행동이나 그 장면을 구체적으로 상상하는 일이
스트레스 반응을 완화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결과가 보고되었다.
물론 청소만으로 마음의 상처가 치유된다는 뜻은 아니다.
어쩌면 몸을 움직여 눈앞의 작은 일을 정리하는 동안
복잡한 마음에도 잠깐 숨 쉴 틈이 생기는 것인지 모른다.
세탁기가 멈췄다.
빨래를 꺼내 베란다로 향했다.
셔츠의 구겨진 소매를 펴고, 수건을 털어 널었다.
한 장씩 널다 보니 아무 생각 없이 손을 움직이는 시간이 의외로 편안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빨래 사이에 내려앉았다.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상처를 치유한다는 것은 아팠던 기억을 완전히 지우는 일이 아니라,
그 기억을 안고도 다시 평범한 하루를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마음이 힘들 때 빨리 괜찮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슬픔을 털어내고, 후회를 잊고, 다시 씩씩해져야 한다고 자신을 재촉한다.
하지만 빨래에도 마르는 시간이 필요하다.
물기가 남아 있는 옷을 억지로 입으면 축축하고 불편하다.
마음이라고 다르겠는가.
슬픈 날에는 조금 슬퍼해도 좋고,
마음이 정리되지 않는 날에는 굳이 결론을 내리지 않아도 좋겠다.
그날 오후, 베란다에 널어둔 빨래가 바람에 천천히 흔들렸다.
아침에 나를 괴롭혔던 걱정들이 모두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내일 출근하면 여전히 마주해야 할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마음이 조금 가벼웠다.
적어도 오늘 해야 할 일 하나는 끝냈다는 소박한 안도감 때문이었을까.
빨래를 걷으며 셔츠에 코를 가까이 대보았다.
햇볕에 말린 옷에서 기분 좋은 냄새가 났다.
세월이 내 마음을 이렇게 말려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억지로 비틀어 짜지 않고, 서둘러 털어내지도 않으면서,
천천히 바람과 햇볕에 맡겨두는 것이다.
인생의 모든 얼룩을 지울 수는 없어도,
우리는 다시 깨끗한 옷을 입고 내일을 시작할 수 있다.
그것만으로도 꽤 괜찮은 회복이 아닐까.
오늘도 세탁기는 돌아간다.
그리고 나의 삶도, 조금은 구겨지고 조금은 낡은 모습 그대로,
다시 하루를 향해 돌아가기 시작한다.
완전히 새로워지지는 못해도 괜찮다.
내일 입을 셔츠 한 장이 햇볕 아래 말라가듯,
내 마음에도 조금씩 보송한 시간이 찾아오고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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