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상처 앞에서 나는 너무 똑똑했다-영화 《시민덕희》, 위로보다 판단이 먼저였던 어느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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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이 보이스피싱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걸 왜 믿었어? 요즘 그런 전화가 얼마나 많은데.”

내 입에서 걱정보다 잔소리가 먼저 튀어나왔다.

평소에는 눈치가 빠르다고 자부했는데, 정작 눈치가 필요한 순간에는 형편없이 둔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 뭔가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돈을 잃고 얼마나 놀랐을까. 가족에게는 뭐라고 설명했을까. 밤새 잠은 제대로 잤을까.

정작 물어야 할 것들은 하나도 묻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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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개봉한 영화 《시민덕희》는 그런 나를 부끄럽게 만든 작품이다.

덕희(라미란)는 아이들을 키우며 세탁소에서 일하는 평범한 여성이다.

화재로 일터를 잃고 생활이 막막해진 그에게 대출을 해주겠다는 전화가 걸려온다.

살길이 급했던 덕희는 상대의 말을 믿는다.

하지만 대출은커녕 거액의 돈만 빼앗긴다.

경찰에 신고하지만 수사는 답답하다.

아이들에게 여전히 밥을 먹어야 하고, 내일의 생활비도 마련해야 한다.

절망했다고 삶이 잠시 멈춰주는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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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을 빼앗긴 뒤, 자신을 속였던 조직원 재민에게서 뜻밖의 구조 요청을 받는다.

덕희는 봉림과 숙자, 애림의 도움을 받아 범죄 조직을 추적한다.

덕희를 움직이는 것은 잃어버린 돈만은 아닐 것이다.

억울한 일을 당했는데도 자신이 어리석은 사람처럼 취급되는 현실,

누구도 자기 말을 충분히 들어주지 않는 막막함이 함께 있다.

박영주 감독도 피해자들을 만나면서,

잘못은 범죄자에게 있는데 피해자들이 자신을 탓하는 모습이 안타까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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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을 읽으며 내가 했던 질문을 떠올렸다.

“왜 당했어?”라는 말은 원인을 묻는 것처럼 보여도,

듣는 사람에게는 책임을 묻는 말이 될 수 있다.

사기꾼이 만든 상처에 내 한마디가 덧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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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자 멜빈 러너는 사람들이 세상이 공정하다고 믿고 싶어 하는 마음을 연구했다.

누군가 불행을 당하면 그 사람에게도 잘못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심리이다.

그래야 나만 조심하면 그런 불행을 피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니 나 역시 그랬다.

지인의 실수를 지적하면서 나는 안전한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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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사기꾼들은 사람의 어리석음만 노리지 않는다.

절박함을 파고들고, 가족을 걱정하는 마음을 이용하며,

누군가를 믿고 싶은 평범한 마음까지 범죄의 도구로 삼는다.

사람을 믿었다는 이유로 피해자가 부끄러워해야 한다면, 세상은 얼마나 쓸쓸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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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 마음이 가는 것은 덕희 곁으로 모여드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완벽한 전문가도, 빈틈없는 영웅도 아니다. 말이 부딪치고 계획도 매끄럽지 않다.

그런데 덕희를 혼자 두지는 않는다.

나는 그 모습에서 연대의 크기를 다시 생각했다.

대단한 능력이 있어야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고 여겼지만,

때로는 상대의 억울함을 귀찮은 일로 밀어놓지 않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다.

“네가 잘못한 건 아니야.”

“어디까지 알아봤어?”

“필요하면 같이 가줄게.”

이런 말에는 세상을 단번에 바꾸는 힘은 없을지 모른다.

그래도 혼자라고 느끼던 사람에게 다음 행동을 할 여유를 줄 수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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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 나는 그 지인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지난번엔 내가 말을 너무 쉽게 했어. 미안해. 많이 힘들었지?”

다행히 그는 괜찮다며 웃었다. 우리는 조만간 점심을 함께 먹기로 했다.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꼬치꼬치 묻지 않을 생각이다.

그가 말하고 싶으면 듣고,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으면 함께 웃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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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보니 말 한마디로 남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일은 생각보다 드물다.

하지만 말 한마디로 이미 아픈 사람을 더 아프게 만드는 일은 참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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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나는 지인에게 세상 물정을 가르치려 했다.

정작 배워야 할 사람은 나였다.

상처받은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알려주는 사람이 아니라,

그 일을 겪고도 여전히 존중받을 만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느끼게 해주는 누군가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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